버스를 타고 행사장으로 향하던 중 A가 놀라며 한 말이다.
자기 딸이 친구와 함께 내 앞자리에 앉은 모양인데, 둘이 얌전히 잘 있는지 확인하러 왔다가 우리 모자를 발견한 것이다.
엄마와 아들이 끊임없이 단어를 주고받으며 뭔가 게임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나와 아들이어서 놀랐다고 한다. 바로 근처에 우리가 앉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발견해 놀라기도 하겠지만, 두 사람이 노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라고 했다.
"기차"
"차선"
"선물"
"물감"
"강도"
야... 물감에서 어떻게 강도가 나오냐?
아들은 '감'과 '강', '정'과 '전'처럼 ㅁ, ㅇ, ㄴ 이 종성으로 쓰이는 단어가 나오면 그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어한다. 복모음과 경음도 혼동하긴 마찬가지다.
이런 아들의 실력을 알기에 나는 경기에서 설렁설렁 상대해 준다. 어른인 내가 승부욕에 눈멀어 아무 단어나 내뱉었다가는 경기가 금세 중단될 것이 뻔하니까. 토종 한국인이요 직업 때문에 매일 사전을 달고 사는 엄마와 영국에서 나고 자란 초딩이 벌이는 한국어 게임이란 시작부터 불공평하다.
두 모자가 심심풀이로 하는 놀잇거리가 남들에겐 색다르게 보였나 보다. 이날 나와 아들의 끝말잇기 장면을 지켜보고 혹은 엿듣고는 인상적이었다 말해 준 사람은 A 외에도 두 명이나 더 있다.
남편의 학업 때문에 영국에 온 A는 2~3년 뒤 다시 한국으로 복귀할 날을 대비해 자녀의 한국어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고 했다. 한국에서 쓰던 교과서와 문제집을 그대로 가져와 아이들에게 읽게 하고 주말에는 한글학교까지 보낼 정도로.
반면, 우리처럼 영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가정의 경우 한국어 교육이 비교적 느슨하다. 영국에서 계속 학교를 다녀야 할 자녀에게 최적의 학습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거나,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일 수 있다. 당장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따라가야 하고 한국과는 사뭇 다른 입시 제도도 적응해야 한다. 한편, 또래 학생이 읽어야 할 필독서도 챙겨야 하고.
이날 우리 두 모자의 놀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중 일부는 이러한 처지라 할 수 있다. 자녀가 성장기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으니 또래에 비해 한국어가 어눌할 수밖에 없다. 한국어를 가르치려 들면 아이가 귀찮아하여, 한국어를 익힐 기회가 더 줄어든다. 이런 때 한국어로 단어 게임을 하는 아이 모습에 놀랄 수밖에. 자녀의 한국어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는 A까지도.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될 무렵 남편이 한 말이다.
지금처럼 집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아들의 등하교를 내가 도맡아 하던 시절이다.
내가 한 일은 단순히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만이 아니다.
교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운동장에서 기다리며 아이가 친구와 어울리는 모습을 관찰했다. 하교 시간에는 하루 일과를 전해 들으며 아들이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지 눈치를 살폈다.
교사와의 상담 시간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학교에서의 아이 행동’에 대해 질문했다. 아들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아이들끼리 간식도 만들어 먹고 놀게 하고, 이 과정에서 다른 학부모와 친구로부터 아들에 대한 '제삼자 평가’도 들었다.
몇 개월간 이런 식으로 관찰하는 과정에서 아들이 주변 사람과의 소통에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아이와 같이 놀겠다고 손을 잡아끌어 가고, 생소한 한국식 이름을 반가이 부르며 달려오고, 생일 파티에까지 초대하겠나? 학교에서 소통을 못하는 아이가 아침마다 신이 나서 등교를 하겠는가?
간혹, 바쁜 일정으로 인해 시간을 못 내는 나를 대신해 남편이 아들의 등하교를 시켜준 때가 있다. 아이를 차로 태워주고 교실 문이 열리면 곧장 들여보낸 후 훌쩍 떠나는, 남편 입장에서는 최선의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이 남자도 아이의 행동을 관찰할 기회는 있었겠지만,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장소와 배경, 사람을 통해 꾸준히 데이터를 축적한 나의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지 않은가.
당시 남편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곰곰이 따져보면, 집에서 영어로 대화 나누자는 주장이 나온 건 아들의 행동을 관찰해 내린 결론이라기보다는, 주변 사람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친구를 만나고 올 때마다 한 번씩 새로운 주장을 펼치던 사람이니까.
우리가 고국을 떠나 살면서 만난 이들 중에는 석박사급 학력에다 전문직 종사자가 제법 있다.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가 내세우는 자녀 교육 방침이라면 귀담아들을 만도 하다.
하지만, 이들과 비교해 우리 부부의 학력이나 전문성이 크게 뒤떨어지는 건 아니다.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자기가 담당하는 분야에서만 전문가지, 그 전문성이 자녀 교육에까지 미친다 할 수도 없다.
어린 아기를 둔 집을 방문하여 아이의 건강을 점검하는 제도가 있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 집을 찾았던 간호사의 말이다.
집에서는 한국어로만 대화 나누고 있으며 영어공부는 아이가 좀 더 크면 시킬 계획이라는 내 말에 대한 반박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갓 백일을 넘긴 아들에게 '공부'는 너무나 거창한 단어이기도 했다.
참고로, 위 간호사가 아니더라도, 이 시기에 만나는 영국인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말했다. 영국인다운 발언이다.
영어권 국가일수록 국민의 외국어 능력이 떨어진다는 발표가 있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영어가 통하지 않는 장소가 없으니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절실함도 덜하겠지.
오랜만에 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친구 이첸이 한 말이다.
모임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아들과 내가 한국어로 대화하는 모습에 친구가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딸에게는 중국어 안 가르치냐고 물었더니, 부모의 말을 알아들으면서도 반응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딸과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 집에서 영어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에서 대화가 그쳤으면 좋으련만, 이첸은 아이에게 억지로 2개 국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대화를 계속 이끌어갔다.
영국에 살면서 모국어까지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친구의 주장에 내가 반박하다가 대화가 이렇게 흘러갔을 수도 있다. 혹은, 그 반대로, 왜 아이에게 모국어를 안 가르치냐며 내가 따지는 바람에 친구가 대꾸하면서 말이 길어졌을 수도 있다.
해외에 정착한 가족의 자녀 교육은, 이들이 해외에 나온 목적과 체류 기간, 가족 구성 형태에 영향을 받는다. 각 가정의 고유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녀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강요할 수 없는 이유다.
영국에서는 영어만 잘해도 먹고사는 일에 큰 지장은 없다. 다만, 언어 능력이 인간의 두뇌와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또한, 다른 언어도 아닌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언어라면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언어는 의사소통에만 도움을 주는 수단이 아니다. 외국어를 공부하면 두뇌를 자극하여 인지 능력과 기억력,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되며,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지만,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아이의 학습 능력 개선을 위해 운동이나 악기를 배우게 하듯 외국어 공부도 병행할 수 있는 셈이다.
갑자기, 모국어 이야기 하다가 왜 외국어로 방향을 틀었냐고?
영국에서 나고 자란 내 아들의 경우, 한국어를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처럼 습득하고 있어서다.
고국에서라면 자연스럽게 모국어를 익혀나갈 요소가 도처에 있겠지만, 해외에서는 모국어 교육도 외국어처럼 정성을 들여야 한다.
해외에서의 정착과 자녀 교육, 모국어 교육...
쉬운 과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미소 짓는 일도 발생하기에.
발레? 설거지?
아들의 이메일에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와 기숙사를 바쁘게 오가며 겪은 일을 매주 사진과 이메일로 보내온다.
학교의 조정 클럽에서 로잉 머신을 써본 (혹은 직접 배를 타본) 경험을 전하다가 갑자기 '발레'도 했다길래 아들이 정말 발레를 했나 싶었다. 아직 동아리를 정하지 못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특히 운동에 관심 많은 아이니까.
아들은 영어로 먼저 익힌 언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 맞춤법 무시하고 영국식 발음 그대로 가져오는 편이라 생소한 단어가 탄생하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발레를 '발레'라 발음 안 하거든. 아들이 '발레'라 했을 때 의심했어야 한다.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물론 이니셜까지 모두 가명이며, 소개된 각 일화도 약간씩 각색되었습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Mikhail Nilov o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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