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오래전, 한 생명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
고2 시절, 부모님을 졸라 40일 된 말티즈를 데려왔고
그 아이와 함께 15년을 살았다.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늙어가던 그 시간은 나의 청춘이자 첫 번째 가족의 형태였다.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는 조용히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속에 단단한 다짐을 했다.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겠다.”
떠나보낸 사랑의 빈자리는 너무 깊고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도 낯설 만큼 선명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건 언젠가 이별해야 한다는 뜻임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흘러,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졸랐다.
“엄마, 강아지 키우면 우리가 다 할게.”
“엄마는 밥 안 줘도 돼. 산책도 우리가 할 거야.”
심지어 서로 각서까지 써서 내밀었다.
어떻게 돌볼지 세세히 적은 편지를 읽으며 웃었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사랑은 결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육지에서 살던 어느 평범한 주말 오후
아이들과 함께 시내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강아지 분양샵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저 구경만 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곳 유리장 안에
아주 작고 따뜻한 생명 하나가
우리 셋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새하얀 털, 아직 세상을 다 배우지 못한 눈빛,
유난히 작게 떨리던 숨결.
그 순간, 내 안에서 잊고 지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사랑은 이렇듯 예고 없이 아주 조용히 찾아오는 법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생명 앞에서
시간이 멈춘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아이가 우리 가족이 되겠구나.
한 생명이 우리를 택했구나.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음을 내어주었다.
두려움보다 따뜻함이 조금 더 컸던 그날
한 마리의 작은 생명이
우리 셋의 인생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후의 이야기는
제주의 바람, 파도, 흙냄새 속에서 이어진다.
낯선 섬에서 우리는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그 생명의 이름은 ‘코코’.
아직 만 두 살이 되지 않은 작은 존재.
그리고 나는 그 아이를 통해
다시 한번 배웠다.
사랑은
끝이 두렵더라도
다시 시작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한 생명을 품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을 다시 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