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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줄보다 중요한 것, 아이를 믿는다는 것의 무게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는 순간, 진짜 성장이 시작된다

by Remi

제주살이를 시작한 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제주의 바람처럼 자유롭고 제주의 바다처럼 거칠기도 하며 제주의 하늘처럼 예측할 수 없는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보면서 나는 종종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도 분명한 한 가지가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믿기로 한 사람이라는 것.

솔직히 말처럼 가볍지 않았다.
믿는다는 건 무책임한 방임이 아니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포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이의 가능성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세상의 기준보다 아이의 속도와 방식에 더 귀 기울이는 일. 그게 내가 말하는 ‘믿음’이다.


어느 겨울 저녁, 아들을 기다리며 깨달은 것

아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두세 시간을 놀다가 스쿨버스를 놓칠 때가 많다. 집에서 학교까지 차로

이동하면 5분, 도보로는 50분이다.

해가 짧아진 겨울, 어둠은 금방 바닥에 스며들고

나는 따뜻한 거실 창가에서 조용히 아이를 기다렸다.
아들은 혼자 옵서버스를 호출해 어둠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작은 여행을 마친 사람처럼 익숙하면서도 당당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이 묘하게 갈라졌다.
‘아이가 너무 자유로운 건 아닐까?’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마음이 말했다.

‘그래도 혼자 해결하고 혼자 판단하고

혼자 돌아왔잖아.’
‘이 아이는 이미 능동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구나.’

두 마음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깨달았다.
불안은 나의 것이지만 능동성은 아이의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능동성을 가로막지 않는 것이,
내가 부모로서 선택해야 할 태도임을.



공부보다 ‘자기 세계’를 먼저 구축하는 딸

딸은 어릴 때부터 춤을 사랑하고 그림을 사랑하며 예술적 감각으로 하루를 채운다. 세상의 수많은 아이들처럼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하교 후 책상 앞보다 음악 앞에 앉아 있고 문제집보다 스케치북을 가까이 둔다.

나는 때때로 불안한 마음으로 묻곤 했다.

“공부는 어렵지 않아?
조금은 예습이나 복습을 하고 노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딸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엄마, 나는 아직 할 수 있어.
학교 공부 어렵지 않아.”

그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아이는 스스로의 리듬을 알고 자기 세계를 스스로 구축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감사했다.
아이의 능동성은 부모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라는 것.

나는 그 세계를 부러움과 존중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의 시간을 부모가 스케줄로 채우는 일에 대하여

나는 이제야 분명해졌다.
부모가 아이에게 너무 많은 스케줄을 부여하는 건
아이의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숨을 조이는 일이라는 것을.

스케줄은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내면은 효율이 아니라 경험과 호기심,
그리고 능동성으로 자란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너는 왜 이걸 안 했어?”라고 닫아버리는 것보다
“너는 이걸 왜 이렇게 선택한 거야?”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이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부모가 미리 만들어놓은 일정표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스스로 선택하는 힘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자유의 여지를 가진 아이는
책임을 배우고 판단을 배우고 선택의 무게를 배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이 스스로 자신의 하루를 ‘의미’로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의미 없는 효율보다는
의미 있는 경험이 아이의 미래를 지탱한다.



제주가 키워낸 능동성 — 그리고 그 능동성을 지켜주는 엄마

제주는 아이들을 놀게 만든다.
공부를 막는 것이 아니라
삶을 깊이 체험하게 만든다.

아들은 제주시 곳곳을 친구들과 버스로 누비며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자신의 발로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배운다.

딸은 춤과 그림이라는 자기만의 감각 세계에서

강력한 성장의 힘을 스스로 키운다.

이 두 아이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내가 요구하고 관리하고 스케줄을 잡았다면
아이들은 지금처럼 스스로 선택하고 움직이고 꿈을 확장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믿으면
아이는 자기를 믿게 된다.
그게 내가 제주에서 얻은 가장 확실한 진리다.


믿음이 키워낸 아이들 — 불안 대신 성장으로 답하는 순간들

아들은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아도
관심 분야에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을 만큼의 집중력을 보여주고 막상 시험을 치면 나름 자신만의 방식으로 좋은 성적을 가지고 돌아온다. 꼭 무슨 대회에서 수상을 해야 되는 것만은 아니다.


초등 시기에 각종 대회와 시험을 전전하며 상을 휩쓸어야 한다는 믿음은 대부분 아이의 미래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모의 불안과 욕심을 달래려는 경우가 많다. 일찍부터 경쟁의 무대에 세우면 아이는 성취가 곧 사랑이라고 오해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힘 대신 지시받는 습관만 남는다. 무엇보다 공부의 즐거움보다 ‘성과’에 중독되어 성장의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는 감각을 잃어버린다.



나는 그런 부작용을 알기에 아이의 능동성을 빼앗지 않으려 한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보여주는 안정감과 자기 주도성은 일찍부터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잃어버리는 바로 그 힘이다. 그래서 나는 스케줄로 다 채우지 않고 믿음으로 빈 공간을 남겨둔다. 그 여백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성장한다.


이 모든 모습 속에서 나는 불안보다 감사함이 먼저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능동적인 아이로 자라준 것에 대한 감사.
스스로 자기 삶을 경영하려는 태도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감사.

나는 이 아이들과의 삶이 결코 걱정으로 채워

지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오히려 날마다 ‘이 아이들은 이미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다’는 확신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들을 믿는다

믿는다는 건 순진한 낙관이 아니다.
그건 아이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아이의 미래를 긴 호흡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능동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준 제주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 능동성을 존중해 주는 나 자신에게도 다정해지고 싶다.

그리고 오늘도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엄마는 너희를 믿어.
너희가 가는 방향이 옳다는 걸 믿어.
너희의 속도와 방식이 너희를 더 단단하게 만들 거라는 걸 믿어.”

부모의 믿음은 아이를 묶는 줄이 아니라
아이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바람 같은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바람을 아이들에게 보내며,
느리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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