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성적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일상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자녀가 영어 고급반에 들어갔다거나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엄마들의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런 이야기들은 때때로 나의 마음 구석에서 잔잔한 불안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제주로 이주해 아이들과 완전히 다른 흐름의 시간을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깨달았다.
성적은 아이 인생의 기둥일 수는 있어도 아이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제주가 가르쳐준 성적이 담아내지 못하는 세계
제주 입도 첫 주, 아이들 얼굴에는 낯섦과 설렘이 동시에 어른거렸다. 새 학교, 새 친구, 새 동네 그리고 여전히 모든 것이 익숙해지지 않은 엄마.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바라보며 마음의 균형을 잡아갔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만의 리듬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학교 가는 길에 스치는 바람의 결을 이야기하고 하굣길에 만난 고양이의 표정에 웃음을 터뜨리며 저녁노을의 색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아이들은 이미 시험지 한 장으로는 담을 수 없는 세계를 배우는 중이라는 것을.
집중력, 감정의 결, 자연을 감각하는 능력, 자기만의 언어. 이 모든 것은 성적으로 평가되지 않지만 아이의 삶을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자산들이다.
부모인 나를 먼저 아는 일
그러나 제주살이를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또 다른 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이의 삶에서 성적보다 중요한 것을 말하기 전에 나는 과연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엄마라는 역할은 너무 자연스럽게 몸에 붙어버려 나라는 개인이 지닌 감정과 한계, 성향이 뒤로 밀리는 때가 많다. 하지만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부모인 나’를 알아야 했다.
나는 어떤 순간에 불안해지고 어떤 상황에서 조급해지며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인지 모르면 아이의 감정과 리듬을 온전히 읽어낼 수 없다.
제주는 내게 그 질문을 피하지 말라고 말했다.
파도가 밀려오듯, 그 질문은 꾸준히 나에게 닿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지금 어떤 감정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가?”
“아이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하는가 아니면 내 두려움을 덮기 위해 아이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나를 조금씩 부모로서, 한 사람으로서 투명하게 만들었다. 아이보다 먼저 나를 읽어내는 일이 결국 아이를 자유롭게 성장하게 하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방법이 아니라 우리 가족만의 방식
세상에는 참 많은 육아 조언이 존재한다.
따뜻하게 “당신은 잘하고 있어요”라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있고 현실을 냉정하게 짚으며 “지금은 바꿔야 할 때”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조언들 사이에서 결국 깨달은 건 이것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정답은 없고 결국 중요한 건 ‘남들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맞는 ‘나만의 방식’이라는 것.
제주에서의 삶은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조금 더 천천히 갈지, 조금 더 단단한 경계를 만들지
혹은 마음을 넓혀 아이의 감정을 먼저 들어줄지.
이 모든 선택은 외부의 조언이 아닌 내가 우리 가족의 특성을 이해하며 찾아낸 결정이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부모가 될 때 비로소 우리 가족에게 꼭 맞는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방식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평범한 일상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 1 — 질문하는 능력
공부를 잘하는 아이보다,
세상을 향해 “왜?”라고 묻는 아이가 더 넓은 세계를 산다.
제주에 온 뒤 아이들은 자연과 일상 속에서 질문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왜 오늘 바람이 차가워?”
“왜 같은 파돈데 소리가 매일 달라?”
“왜 어른들은 공부가 중요하다고만 말해?”
이 질문들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 이것은 성적보다 훨씬 멀리 간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 2 — 감정을 다루는 능력
제주는 아이들의 감정을 풍성하게 흔들어 놓았다.
울컥하는 순간도 많았고 기분이 예민해지는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감정을 하나씩 꺼내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건 서운함이야.”
“이건 불안이야.”
“이건 기쁨이고,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아.”
감정의 이름을 아는 아이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으로 자란다. 삶의 풍랑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는 힘을 기르게 된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 3 — 관계를 맺는 능력
제주 학교에서 아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 속에 뛰어들었다. 아들은 농구로 친구들과 금세 가까워졌고
딸은 창작댄스 수업에서 자기만의 리듬을 찾았다.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 타인을 살피는 눈, 친구를 위로하는 손길.
이 모든 관계의 기술은
성적표에 적히지 않지만
아이의 평생을 지탱하는 가장 현실적인 힘이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 4 —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무엇보다 성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능력이다.
자신을 믿는 아이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는 누구의 기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제주에서 아이들이 이런 힘을 배웠으면 한다.
변화가 잦은 삶 속에서도 자신만의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말한다
“성적은 네가 가진 수많은 색 중 하나에 불과해.
너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색을 가진 아이야.”
성적으로 아이의 가능성을 재단하지 않고 아이의 세계를 넓히고 깊게 만들어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제주는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확신한다.
아이 인생에서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해할 줄 아는 마음, 스스로 질문하는 힘, 감정을 다루는 기술,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깊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이 모든 것이 아이를 끝까지 지켜줄 것이다.
성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훨씬 더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