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잘 마무리한다는 건

어느덧 연말

by Remi

제주에서 맞이한 12월은
예상보다 훨씬 조용하다.
도시에서의 연말이 늘 소란과 결산으로 가득했다면
이곳의 12월은 오히려 말을 아낀다.
바람은 낮아지고, 해는 일찍 물러나며,
하루는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접힌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속도가 느려지자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생각들이
하나둘 고개를 든다.
올해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지나쳐왔는지,
굳이 애써 묻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대답을 건넨다.

예전의 나는 연말이 되면 늘 바빴다.
새해 목표를 세우는 데에도,
나 자신을 평가하는 데에도.
무언가를 더 잘하지 못한 이유를 찾느라
한 해를 끝까지 몰아붙이곤 했다.
마무리는 늘 다음을 위한 발판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에 와서
나는 조금 다른 연말을 맞이하고 있다.
더 나아가기보다
잠시 멈추는 쪽에 가까운 마무리.
더 채우기보다
정리하고 내려놓는 쪽에 가까운 시간.

이곳에서의 삶은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보다
질문을 거두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대신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느슨하지만 다정한 물음으로.

그래서인지 요즘의 나는
새로운 계획보다 기록을 먼저 펼쳐 든다.
거창한 다짐을 적기보다는
지나온 하루를 천천히 복기한다.


그날의 날씨, 아이들의 표정,
괜히 마음이 흔들렸던 순간들.
아무도 보지 않을 문장들을
굳이 남긴다.


그날의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다, 그날의 내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일.









한 해를 잘 마무리한다는 건
어쩌면 잘 살아냈다는 증거를 찾는 일이 아니라
잘 버텨온 나를 조용히 안아주는 일이다.

제주에서의 12월은
그 사실을 자꾸만 일깨운다.
바쁘지 않아도 괜찮고
아직 정리되지 않아도 괜찮으며
모든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나는 이제
연말마다 나를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억하고 싶은 순간 몇 개를
차분히 적어 내려갈 뿐이다.

어떤 날은 잘 해낸 하루를,
어떤 날은 그저 무사히 지나온 하루를.

그렇게 기록하다 보면
한 해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면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올해의 나는 충분히 애썼는지,
조금은 다정해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는 않았는지.

제주에서 맞이한 이 12월,
나는 그 질문들 앞에서
처음으로 솔직해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다음 해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지금의 나를
조용히 기록한다.

마무리란
끝이 아니라
나를 다시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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