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마치 내가 겪는 듯 이입하고 몰입하는 경험이 좋았다. 중학생 때까지는 학교 바로 옆에 시립도서관이 있어서 하굣길에 들러 책을 빌려 읽곤 했지만, 대학입시가 시작되는 고등학생 때부터는 오로지 취미만으로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책상 위에 소설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으니까.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여전히 책 읽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어 몇 번 책 읽기를 시도했지만 그리 쉽지는 않았다. 자꾸 잠이 쏟아지거나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책에 집중도 잘 되지 않았고, 바쁜 회사생활로 영 시간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핑계에 가깝겠지만.
그러던 중 30대 초반에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별을 하고 나니 내게 남는 시간이 너무 많아졌다. 아침잠 많은 내가 아침에 눈도 일찍 떠지고,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헤어진 남자친구가 떠올라 괴롭기만 했다. 주체할 수 없이 남아도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내게 이렇게나 시간이 많았던가’ 생각하니 새삼 새로웠다. 이렇게 귀한 시간에 고작 헤어진 남자친구를 떠올리는 게 아닌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사두고 내내 책꽂이에만 꽂혀있던 책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 독서가 나의 가장 큰 취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읽어낸 책들이 쌓였고, 이 감상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내 주변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책 이야기를 하면 따분해하거나 나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가끔은 내가 책을 좋아하고 여가시간을 독서로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때로 그런 말들에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부끄럽거나 숨길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편을 찾기로 했고, 용기 내 독서모임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참여한 지 7년이나 되었다. 막연히 오래 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글자로 ‘7년’이라고 쓰니 정말 오래 꾸준히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독서모임은 매주 수요일 저녁에 5-6명 정도가 모인다. 때로는 4명이 모이기도 하고, 갑자기 인원이 몰리면 8명이 참석하는 날도 있다. 인원이 많으면 많은데로, 적으면 적은데로 재미있다. 우리는 같은 취미를 가졌지만, 각자 직업이 다르고 속한 세상도 조금씩 달라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사람의 삶을 조금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고 그만큼이나 다양한 성향,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낀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자신의 근황을 얘기하고 읽은 책을 소개하다 보면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에 대해 참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되지만, 또 그렇다고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게 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 난 이 적당한 거리감이 참 좋다.
내가 읽는 책은 주로 소설이라 책을 소개하려면 책의 줄거리를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독서모임을 처음 시작할 땐 이렇게나 재미있게 읽은 소설의 내용을 괜히 내가 소개해서 아무도 안 읽고 싶은 책으로 기억 남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더듬더듬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 나의 감상을 덧붙이고, 그리고 모두가 동의한다면 결말의 스포까지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독서모임 안에서 이야기꾼이 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간단한 연기력까지 더해 인물들을 설명하다 보니까 어떤 회원에게는 마치 티비프로그램 꼬꼬무를 보는 기분이라고, 이야기에 엄청 깊게 몰입했다는 극찬(?)을 받아보기도 했다.
매주 독서모임에 참가해서 반강제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다 보니 의외의 스킬들도 생겼다. 예전에 비해 말을 조금 더 조리 있게 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읽은 책의 내용 중에서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흥미를 끌 수 있을지 짐작해 보고, 그 부분을 이야기할 때 좀 더 신경 쓰게 되기도 한다. 그런 장면에선 연기력을 아주 조금 더 과하게 첨가한다거나 다른 장면들과 비교해 좀 더 세밀한 묘사를 더하기도 하는 식으로. 그렇다고 내가 엄청난 달변가가 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앞에서 말하고자 할 때 심장부터 두근거리고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던 예전의 나와 비교해 보면 꽤 많이 발전했달까.
독서모임이 끝나고 건물을 빠져나오면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세상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2시간 동안 다른 세상에 잠깐 발을 담갔다가 나온 느낌이다. 휴가나 연차가 따로 없어 어딘가 길게 여행을 다닐 수 없는 지금의 내 삶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어지는 2시간의 소중한 차원여행이 바로 독서모임이다.
얼마 전 지인의 주선으로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처음 만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상대방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독서모임 다니신다고 들었는데, 독서모임은 진짜 책이 좋아서 나가시는 건가요?”
그의 말투엔 약간의 웃음이 섞여 있었는데,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웃음은 아니었다.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오히려 약간 비웃음에 가까웠달까. 책이 좋아서 나가는 독서모임이 아니면 그 사람은 내가 어떤 이유로 독서모임을 나간다고 생각한 걸까.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나를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하는 몇몇의 지인들 역시 내가 독서모임을 나간다고 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독서모임을 통해 이성을 만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직도 독서모임 다녀? 거기 괜찮은 사람은 있니?”
주로 이렇게 질문이 이어지고, 그런 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 ‘그런 영양가 없는 모임은 왜 그렇게 열심히 다니느냐’고 물어오는데, 그러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진짜 책이 좋고 재밌어서 나간다고 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으로 취급될 것이 뻔하니까. 물론 독서모임을 통해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것은 매우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취미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다만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
그렇다고 지인들 중 모두가 나의 독서모임 참석에 대해 지루하게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멋지다고 말해주거나 꾸준히 오래 하는 취미가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소개팅을 주선한 지인 역시 내가 독서모임을 나간다는 사실을 멋지다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고, 아마도 소개팅남에게 조금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독서모임은 진짜 책이 좋아서 나가냐고 묻는 소개팅남의 질문에 나는 나의 취미에 대한 순수함과 애정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차분하고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화가 많거나 때때로 발끈하는 성격의 소유자도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소개팅남의 질문에 똑같이 약간은 비스듬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책이 좋으니까 독서모임을 나가겠죠?”
나도 내 성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책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