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과 저승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
여기는 소원암.
삼성각 옆 작은 텃밭이다.
이슬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인데 스님은 아까
부터 풀을 뽑고 있다. 옥수수가 듬성듬성 서 있는
텃밭 한편엔 호박잎이 무성하다. 그 사이에 상추
몇 포기가 있는데 그 옆에 조그만 함지박을 놓고
등을 한껏 구부려 앉아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냥 헛손질만 계속하거나 가만히 있거나 그러고
있다.
아마도 심란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율력을 하려
하나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 천상동자'가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그대로 서서 한 참을 바라보다가 신당으로
들어간다.
" 아무래도 그냥 두면 안 되겠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압력하고 있는 명도동자에
게 말한다. 듣고도 모른 척하고 있던 명도동자. 하던
걸 한참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원탁에 가서 앉는다.
" 에이그 물러터져 가지고선... 아니 그 사위가 죽은
게 본인 탓도 아닌데 왜 저럼..?. 어차피 운명이었는
데. 그리고 돈도 많이 안 받고는 모든 걸 제일 좋은
재물로 천도재 정성껏 했고, 앞으로 기도 많이 해서
아이들도 잘 되게 도와주면 되지 며칠째 왜 저럼..? " 명도 동자가 혀를 끌끌 찬다.
" 어린 딸들이랑 보니까 마음이 좋지는 않겠지.
우리 제자가 본디 마음이 연하잖어. 나도 짠하던데
오죽하겠어" 천상동자가 작은 소리로 말한다.
" 그러게 알려줬을 때 하라는 대로 했어야지!!
인간들이란 꼭 일을 당해봐야 안다니까. 어린아이가
뜨거운 걸 만져봐야 뜨겁다는 걸 알고 나선 다음에
안 만지는 거랑 똑같아. 다음에 어떻게 하라고 잘
알려줬으니까 이제는 말 듣겠지 뭐."
둘 다 말이 없다.
말은 서로 안 했지만 제자가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건 똑같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결국 제자를
호출한다.
들어와 앉은 제자의 본새를 보니 팔꿈치까지 걷어올
린 소매에는 군데군데 흙이 묻어있고 바지 엉덩이
는 아침 이슬에 젖어있다. 얼굴은 며칠째 한숨도
못 잔 표시가 나도 심하게 난다. 가을 낙엽처럼
누리 끼리 한 데다가 푸석푸석하다.
" 아니, 왜 또 그러는 거야 ~~ "
한 껏 목소리를 높였던 명도동자가 제자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애써 목소리를 낮춘다.
" 속상하고 짠한 마음은 알겠는데 어쩌냐고.?"
눈만 꿈벅이며 제자가 한 참을 그냥 앉아있다,
답답해진 명도동자가 한 소리 하려고 하자 천상동자
가 눈짓으로 말린다. 제자는 한 참 후에 입을 뗀다.
" 5년 전에 말해놓고도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저도
깜박 잊었었지요. 그 남자영가가 나쁜 귀신은 아니
었고 그저 외로움이 사무쳐 있었던 것뿐이라서 가만
두면 사람에게 크게 해를 끼치진 않을 거였으니까요. 그리고 말해줘도 믿지 않는데 제가 혼자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뒤로
소원암에 다니기라도 했었으면 제가 보고 생각이
났을 텐데, 그럼 한 번은 더 말을 해봤을 수도 있었
을 텐데 그 뒤로 오지도 않았고... 5 년이나 지나서
갑자기 찾아와 그렇게 되었다 하니 제가 좀 놀랐지
요. "
" 그러니까 그전엔 믿지 않다가, 괜히 이상한 소리
나 한다고 무시하다가 이제 막상 당하고 보니 그 말
이 생각났고, 정말 그 스님말이 맞는구나 싶으니
바짝 무서워서 찾아온 거잖아. 지금까지 그런 사람
들이 어디 한둘이었냐고..? 그럴 때마다 그렇게 매
번 맘 못 잡고 휘둘리면 어쩌자고. 그러는 거임..?"
답답한 마음에 명도동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
졌다 한다.
" 저도 제가 가끔 무서워서요. 아니 무섭다는 게
다는 아니고 솔직히 산다는 게 뭔지 싶기도 하고요... 저야 동자님들과 또 찾아오는 사람들의 조상 영가님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말하고, 또 그들에게 들은
사실 그대로 전하고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야 어디
그걸 한 번에 믿냐고요. 보통은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 저 땡중이 돈 받아내려고 그러는구나'
하고 안 오고 말죠. 그래서 가끔은 알아도, 들었어도
'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
고민하게 되는 일이 많지요. 그래도 말 안 해주면
안되니까 말하긴 하는데 듣고 말고는 그 사람 선택
이지요. 그래도 개중엔 제 말을 잘 듣고, 믿는 사람
도 있긴 하고, 그 사람들은 하라는 대로 하면 일이
순탄하게 잘되니까 저도 보람 있고 좋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고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다가 이렇게 일이
닥치면 그제사 오니까.. 그걸 매번 보고 있자니 힘이
드네요 "
다 말이 없다.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고, 처음 하는 얘기도 아니다.
영가의 세계를 , 신들의 세계를 그 누가 어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심정은 그 답답함은
늘 알고 있는 얘기고 앞으로도 아니, 내일도 모레
도 되풀이 될 일이니까...
" 네가 왜 무대포 스님인지 알지..? "
명도 동자가 제자를 보고 말한다.
" 내가 아무리 자료를 찾고 , 찾아도 복을 지은게
없어서 정말로 소원을 이뤄줄 수가 없는 사람인데도
네가 이 사람은 정말 딱하니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
고 맨날 무대포로 우기고, 밤새워 안 가고 떼쓰고
기도하고, 수천 배 절하고, 눈 오는데 돌 길에서
오체투지 하면서 우릴 맨날 맨날 협박했잖아. 그래
서 어쩔 수 없이 저 무대포 제자가 죽기 살기로 고생
을 하니까 , 그 집 조상에게 가서 협상해서 조상하
고 합의해서 합격시키고, 병 낫게 해 주고, 취직시키
고 그렀잖아.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했어..?
원래 합격할 실력이었다고 하고....
누가 소개해준 약을 잘 먹어서 나았다고 하고...
면접을 잘 봐서 취직했다고 다 핑계 대고....
그러고는 고마운지도 모르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잖아. 아니 그럼 진작에 여기 오기 전에 그렇게들
하지..? "
왜 저런 얘길 하나 싶은 뚱한 얼굴로 제자가
명도동자를 본다.
"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게 맘 아파하지 말라는
말이야. 그렇게 배신당하고도 그렇게 측은해하고 ,
맘 아파하고.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리고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이승하고 저승은 종이
한 장 차이야.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서로 이어져
있다고. 알잖아..? 이번 영가도 살아생전처럼 가족
을 직접 만나지 못하지만 늘 곁에서 보면서 지켜주
고 보호해주고 할 텐데 왜 그래..?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왜 돌아가셨다고 하겠어..? 원래 있던 곳에
서 잠시 이승으로 와서 전생의 인연법에 의해서
가족이 되었던거야. 그 인연이 다 해서 헤어지게
된거고...
앞으로도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어보러 오면 지금처
럼 앞 일을 알려주고, 또 그 사람이 그대로 하면
잘 되려고 복이 있는 거고, 또 말을 안 듣고, 우릴
안 믿고 , 안 하는 것 또한 그 사람의 선택이고
인생인거지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러니까
더 이상 여러말 하게 하지 말고 이제 정신 차려 알았
어..? "
괜스레 눈을 부릅뜨고 치껴 뜨면서 힘주어 말한다.
그리곤
" 이틀 지나면 점심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거야.
오늘 기도는 감해줄 테니까 가서 밥 챙겨 먹고
잠도 좀 자고 몸 챙기고 있어"
말을 남기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가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