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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길의 여유 Oct 02. 2023

BBB

전화통역봉사

퇴직 후 몇 가지 봉사활동을 하면서 계속된 질문은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였다.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재능을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있다면 영어 정도. 내가 하는 영어는 사무실에서 쓰는 업무용이라 그리 크게 쓸모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봉사활동에 대한 안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으로 나름대로 기준을 만들었다.     기여하고자 하는 재능을 영어로, 돕고 싶은 대상은 한국말이 필요한 외국인으로, 그들에게 마음 따뜻한 한국인으로 기억되고자 생각했다. 

    

BBB는 24시간 휴대전화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20개 언어로 소통한다. 통역이 필요한 외국인이 전화하면 언어에 따라 봉사자 차례로 전화를 받는 시스템이다. 다른 봉사에 비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아 부담이 없다.     

간단한 길 안내부터 까다로운(?) 병원과 경찰서 통역까지. 특히 전문 용어인 질병과 범죄 용어는 따로 정리하여 소지하고 다닌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 번은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술에 만취한 외국인이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도착했으나 잠이 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택시비를 받을 수 없던 운전기사가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이 흔들면서 깨우자 무의식 중에 주먹을 날려 경찰을 폭행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부인이 알면 얼마나 상심이 크겠느냐, 술을 끊어라, 학생들 앞에서 그러고도 네가 교수냐 정신 차리라 등등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통역이 아닌 한바탕 엄마표 잔소리를 퍼붓고 나니 속은 시원했지만, 덩치 큰 외국인의 후환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다행히 그는,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사과했다. 앞으로 통역에만 집중하기로 다짐했다.    또 하나, 한 외국인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랫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아 버스 도착 정보 불편을 신고했다. 나도 가끔 그랬던 경험이 있어서 격하게 동감했다.  그런 경우를 신고할 수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가장 많은 통역은 택시를 탄 후 목적지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휴대폰에 대한 것이다. 외국인이 유심칩을 구매하고 싶어 하고 요금 충전, 서비스 범위 등에 대한 통역이다.   차량 사고 관련은 보험회사 직원과 사건 사고는 경찰서와 진료는 의료기관 담당자와 통화하며 통역한다.    

 

외국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겪게 되는 길을 묻고, 택시를 잡거나 병원에 가서 증상을 설명하는 모든 불편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사가 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면서 부족하지만 도움이 된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크다.  

   

요즘은 시스템도 진화했다.  상대방과 통화 중 1인을 추가하여 통화하는 기능이 추가되어 동시에 3인이 통화가 된다. CONFERENCE CALL이다.  

     

AI가 만능은 아니다. 아직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고 이를 자원봉사를 통해 해결할 수 있어 뿌듯하다.     

BBB는 봉사자가 자신의 생활 속에서 휴대전화를 통해 제공하는 실시간 봉사라는 특징이 있다.  요청콜이 울리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통역을 해야 한다. 외국어만 잘 구사하면 할 수 있는 쉬운 봉사가 아니라 즉시성과 익명성을 바탕으로 앞으로 드러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후원하는 숨은 도우미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값지고 아름다운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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