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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길의 여유 Oct 03. 2023

2022 김장 풍경

속이 알찬 배추는 멀리서 봐도 가까이에서 봐도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처럼 보인다.
 
 밭에서 깨를 털어 식구들 먹을 들기름을 짜면 한 해 농사의 마무리가 시작된다. 뒤를 이어 치러야 할 진짜 마지막 행사는 김장하기이다. 날씨가 추워져 잘 된 배추가 엉망이 될까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하는 시엄니의 성화에 못 이겨 적당한 날짜를 잡아야 한다. 일정이 있든 말든, 바쁘든 말든 다 소용없다. 일단 정하면 안성에 모여야 한다. 오지 않으면 그해 김장 김치는 못 먹는다는 엄포와 함께 가족 단톡방에 떡하니 '김장하는 날'을 가장 강력하면서도 늘 솔선수범하는 작은 시누이가 공지한다.
 
 김장의 시작은 몇 달 전부터 시작된다. 일정이 되는 사람이 미리미리 필요한 액젓을 구입하여 시댁이 있는 안성으로 공수한다.
 
 김장 며칠 전부터 부지런한 시부모님은 산더미같이 마늘을 까서 준비해 놓는다. 이미 수확해 놓은 고춧가루도 곱고 붉게 단장하고 양념을 버무릴 남정네들의 거친 손길을 다소곳이 기다린다.
 
 일정을 통보받은 노련한 김장 1진 선수들과 어설픈 2진 보조들은 행사 전날 각자의 김치통을 차에 싣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한다. 올해의 참가인원은 아가들까지 포함하면 28명이다.
 
 김장 하루 전 도착한 일꾼들은 밭에서 뽑은 배추, 무, 파들을 경운기로 옮겨 앞마당에 내려놓는다. 뽑는 것도 손질하는 것도 대단히 힘든 작업이다. 액젓만 제외하고 식구들의 땀과 정성으로 직접 농사지은 재료들이다.
 
 커다란 드럼통 네 개에 배추들을 절인다. 무와 기타 채소들을 손질하여 빨간색 대형 고무 대야로, 노란 과일박스로 담아놓는다.
 
 2진 선수들이 10여 개의 채칼을 동원하여 무채 썰기에 투입된다. 채를 썰고 남은 무 조각들은 가는 기계에 넣고 가는 3진도 있다. 썰어놓은 무 재료들을 김장용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아 한쪽으로 옮기는 기운 좋은 4진도 있다. 고작해야 3살에서 5살 배기 5진 아가들은 작은 손으로 무 하나씩 채 써는 대형 고무 대야로 옮긴다. 커다란 김장용 비닐봉지 5개 정도의 양을 채칼로 쓰는 동안 한쪽에서는 양념용 채소인 갓, 파 등을 썰어 담는다. 여기까지 동원된 인원은 어른 23명, 어린이 5명이다. 4대가 모여 협동과 연대의 김장 담기 한마당이 펼쳐진다.
 
 전 식구들이 준비한 재료가 완성되면 구수하게 가마솥에 끓인 된장 배춧국, 숯불에 먹기 좋게 그을린 돼지고기, 다양한 주류와 음료수가 허기진 일꾼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어 김장 전야제의 시끌벅적 절정을 이룬다.
 
 "모두 모이는 날은 김장하는 날이니 매년 이렇게 합시다" 큰 시누이 남편 의견이다.
 "그려! 얼마나 좋아" 큰 시누이 발언이다.
 "큰 오빠가 고기를 구워주니 더 맛있네" 작은 시누이가 한마디 한다.
 "형님, 시부모님 돌아가셔도 우리 김장은 함께해요" 동서도 거둔다.
 형제들도, 조카들도. 아가들도 하하 호호다.
 
 파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전체의견이다. 어떤 진영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는 고달프기 그지없다.
 
 다음 날 새벽, 1진 선수들과 힘깨나 쓰는 장정들이 절인 배추를 씻어 물기를 빼는 작업과 커다란 대야에 김장 양념을 하면서 본격적인 김장이 시작된다. 조촐한 아침 식사 후 남정네들은 길고 커다란 테이블을 마당 한가운데에 세팅한다.  앞마당 한쪽에 커다란 비닐 포장을 깔아놓고 가족 서열 순번대로 김장배추를 담을 김치통들을 일렬로 나열해 놓는다.
 
 무릎까지 오는 장화와 분홍빛 고무장갑, 두꺼운 비닐 앞치마로 무장 한 1진들이 테이블에 쭉 둘러서고 옆에 노란 박스를 갖다 놓는다. 김치통에 양념한 배추를 쉽게 넣기 위해서다.
 
 2진들은 물이 빠진 배추와 양념을 테이블 가운데 날라다 놓아 양념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왕복운동을 한다. 입담 좋은 1진 선수들은 거나한 자식 자랑, 남편 흉들을 나누면서 깔깔거리고 작업한다. 옆에 있는 김치통이 가득 차면 보조들은 다른 집의 김치통과 섞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하며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금방 한 빨간 김장 양념과 잘 절인 노르스름한 배추 속잎에 따끈하고 적당하게 기름진 수육을 돌돌 말은 보쌈은 김장 풍경에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존재다. 올해의 수육 양념은 '김대석 세프'의 레시피로 만들었다. 1진, 2진, 3진, 4진도 아닌 나는 수육 담당이다. 20근이나 되는 돼지고기를 커다란 찜통에 넣고 레시피의 순서에 맞게 돼지고기를 삶아 보기 좋게 썰어 일꾼들의 테이블에 놓는다. 매년 다양한 레시피를 동원하여 새로운 맛을 창출하는 즐거움도 있긴 하다.
 
 한솥 가득 삶은 수육을 접시 가득 담으며 한숨짓는 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조카딸이 ‘큰엄마 인제 그만 쉬세요. 너무 고생하시네요 “ 한마디 했다. 이렇듯 나는 달랑 수육 하나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기진맥진해진다. 내가 힘들다고 모두가 원하는 것을 못 하겠다 할 만큼 용기가 있지 않으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얼떨결에 맏 며느리가 된, 살림살이 서투른 내게 17 가구의 겨울 양식인 김장하기 행사는 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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