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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Apr 27. 2022

거부당했던 최초의 기억

우울중독 - <동굴 파헤치기 프로젝트-4회> , INFJ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가난했다.

가난한 동네에 살아서 다 고만고만하긴 했지만, 특히 우리 집이 더 가난했다는 사실은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어서 깨달은 사실이다.

승용차 두 대가 아슬아슬하게 겨우 지나갈만한 길에 이층짜리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 막다른 골목의 끝에서 왼쪽에 있는 집 이층 전셋집이 우리집이었다.

방은 두 개였고, 하나는 할아버지, 나머지는 부모님과 나, 남동생이 함께 썼다.

싱크대 문은 덜렁덜렁거렸고, 옥상에 빨래를 널러 가기 위해선 다 녹슬어서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얇디얇은 철계단을 올라야 했다.


학교로 가는 길은 험난했는데, 어찌 꼬맹이가 험한 사고 한 번 당하지 않고

등하교를 해냈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산골 오지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학교로 가는 지름 길이 하나 있긴 했는데, 우리집과 맞닿아 있어서 각 집의 2층으로 가는 계단 담벼락 또한 맞닿아 있던 집의 낮은 담을 넘어 그 집을 지나쳐 다른 골목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그 집에 사나운 개가 살고 있었고 나는 개를 무서워했기에 그 담을 넘는 일은

많지 않았다는 거다. 담을 넘다가 그 집주인을 만나는 일 또한 당연히 무서운 일이었다.


네댓 살부터 그 동네에 살기 시작했는데, 특히 여자아이가 많았다.

젖먹이부터 중학생까지 나이 순으로 일렬로 세울 수 있을 정도였고,

밤늦도록 같이 고무줄 뛰기나 숨바꼭질, 망고 같은 추억 속 놀이를 하곤 했다.


그 동네엔 나와 동갑내기 여자아이 두 명이 더 살고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성이 특이해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추xx 와 셋 중 가장 덩치가 컸던 임xx이다.

 추와 나는 같은 유치원을 다녔고, 임은 선교 유치원에 다녔다.

추의 집은 좀 더 의리의리 한 2층 주택 2층이었고, 그 주택의 주인이었으며,

그 조그만 동네에 상대적으로 부자라고 소문난 집 막내딸이었다.

그 아이는 우리 중 가장 작았지만 대장 역할을 했고 성씨와 외모 때문인지 '땡초'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내 기억으론 추와는 서너 번 같은 반이 되었지만

임과는 단 한 번도 되지 않았다. 고만고만했던 여자아이들에게 균열이 생긴 것은

 4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공부랄 것도 없는 그 시절에 반에서 등수를 매겨서

나는 마음에도 없는 부반장이 되었고,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화이트데이, 로즈데이 같은 날들에 남자아이들에게 선물을 한 아름 받아오는 아이가 되었다.

임과 추는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는 아이들이 되었다.


'누가 부반장이 되었네, 반장이 되었네, 학생회장이 되었네' 같은 건

스무 가구 남짓 사는 작은 동네에 금세 소문나는 일이었다.

나처럼 천성적으로 숫기가 1도 없는 엄마는 학부모회 같은 데 가길 극도로 두려워했고,

당시에는 반장, 부반장이 어린이날에 반 전체에 피자라든가 학용품 세트라든가 하는

선물을 돌리곤 했는데,  없는 형편에 힘든 일이었기에 부반장을 꼭 해야 하냐고

탐탁지 않아하기도 하셨다.


.....................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고,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나를 가두며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나의 기억이 각색되었는지도 모른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은 후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기억의 각색'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미친 작품이다.)




어느 날 정신 차리니 나는

셋 중에 왕따가 되어 있었다.

 내 생애 최초의 친구들, 삼총사에서 쫓겨나 거부당하고 있었다. 

셋 중 유일하게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던 추의 집 안방 아랫목에 모여

<날아라 슈퍼보드>와 <달려라 하니>를 보던 추억,

같이 종이인형을 수없이 자르며 했던 놀이들,

다락방에 있었던 추의 나이 많은 오빠 방에 몰래 들어가 보던 추억,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함께 50원짜리 튀긴 쥐포를 사 먹고 퐁퐁(트램펄린)을 타던 추억...

그 모든 것에서 나는 이제 배제되었고, 지워졌다.


그 아이들은 나를 불러내지 않고, 둘이서만 다녔으며,

는 그 아이들을 피해 그 아이들이 없을 만한 시간에 겨우 골목에 나가 길 끝으로 걷곤 했다.

어느 날은 비가 와서 우산을 가져 나갔다가 날이 개어 우산을 말아 접고

골목 끝인 집을 향해 올라가는데, 저 멀리서 그 아이들이 보였다.

막다른 골목의 끝 집. 집에 들어가기 위해선 방도가 없었다.

짐짓 못 본 척하며 반대쪽 끝으로 가는데, 그들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쟤 좀 봐. 비도 안 오는데 우산 들고 다녀. 바본가 봐.ㅋㅋㅋㅋㅋ"

"어우~~ 완전 바보 ㅋㅋㅋㅋㅋ"




90년대 초, 순수했던 11살짜리들이 할 수 있는 욕이란 많지 않았다.

나는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그 애들이 웃는 소리가 귓속을 때렸다.

그렇게 그 동네에서 친구 없이 1년 정도를 그 막다른 골목에서 혼자 등하교하며 견뎠다.

그 사이 학교에서 급속도로 친해진 친구가 전과 정이었다.

전과는 연락이 끊겼고 정과는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그러는 사이 맞은편 집 1층에 살던 임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1층으로 이사 오고 우리 집주인이 되었다.

 혹시나 집을 팔 생각이 있으면 우리에게 팔라고 우리 집주인에게 말해두었던 엄마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하루아침에 친구가 집주인 딸이 되어 나도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어영부영 겉으로만 (내입장에선 반강제적으로) 삼총사가 사이를 회복한 뒤였는데, 어느 날 임이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를 가리키며)

"야! 나 이제 너네 집주인이야!"


아마도 임의 엄마가 아이에게만 먼저 말해 준 모양인데,

그것을 참지 못하고 나에게 말해버린 것이었다.



그 이후 엄마는 이를 갈고 이 동네를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었고,  

그 후진 동네를 벗어나 큰 길가에 있는 아파트를 계약했다.

6학년 중순 즈음에 우리는 방이 3개인 24평짜리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다.

그 동네 누구도 그 골목을 벗어난 역사가 없었기에, 가장 가난한 부류였던 우리가 아파트를 가지게 된 것은 쇼킹한 일이었다. 당시 부산의 뒷골목엔 아파트가 거의 없었다.



이사를 가고 난 후 그 아이들이 조르고 졸라 정말 싫은 마음을 억누르고 거절의 거절을

돌려 말하다가 어쩔 수 없이 딱 한번 우리 집에 초대한 있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수압이 엄청난 화장실의 수도꼭지를 틀고 틀고 또 틀어보던 모습을.




집이 멀어지기도 했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나는

더 이상 그들과 인연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지만, 둘은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예전에 너를 따돌려서 미안하다. 우리는 친구지 않냐. 이해해라.'였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편지들은 욕설과 협박이 담긴 편지로 변했다.

2년 사이 순수했던 아이들은 사라지고, 온갖 괴담이 난무하는 서바이벌 중학교에 가기 위한 준비었는지, 악랄해진 표현 거침없이 써대는 아이들로 변해있었다.

당시 그 대응에 함께해줬던 소중한 친구 정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정이 없었다면 최초로 거부당하고 따돌림당했던 11살의 나는 갈 곳을 잃고

험난한 중학시절을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싸울 때 남편의 표정과 반응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내가 울면서 하는 말이 있다.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내가 거부당하고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어."




나는 자주 대성통곡하곤 한다.

공감 극도로 중요한 F형 인간이긴 하지만,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무너지는 것이 이 기억 때문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고 쓰고 싶어졌다.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괴롭다. 하지만 쓰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당시 엄마에게도 말한 적 없는 사실이다.




간간이 재래시장에서 그 아이들의 엄마를 만난 엄마에게 그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그것도 대략 15년 전의 일이다. 친정도 또 이사를 가서 그 동네를 벗어난 지 오래다.

딱 한 번,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그 아이들과 가곤 했던 초원 슈퍼가 생각나

그 동네를 스트릿뷰로 훔쳐본 적이 있다. 그곳은 세월을 비껴 나 있었다.

응답하라 1998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어린 시절은 거기에서 끝났기에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그 골목 초입에서부터 나는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아 무서웠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그 얼굴들이 거기 살 것만 같다.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작아져서 길을 에둘러 가고, 종종걸음으로 얼굴을 숨긴 채 걷던

어린 내가 있을 것만 같다.

그 기억을 지울 순 없겠지만, 이제는 그 작고 삐쩍 말랐던 여자아이의 등 뒤에 서서

가만히 안아 줄 순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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