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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May 16. 2022

공간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이유

나도 몰라. 알려고 써본다.

지금의 내 꼬락서니가 왜 이런가,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나, 막 짱구를 굴리다 보면

결국은 돌고 돌아 어린 시절의 나에게서 작은 단서를 발견하곤 한다. 오은영 박사님의 <금쪽같은 내 새끼> 외에도 성공적으로 방영되고 있는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국 가정환경이나, 부모님/형제자매 등 가족과의 관계 등 그 사람이 어린 시절 상처라든지 기억, 경험에 의해 무의식 중에 배운 것들이 그 한 사람을 형성하는 데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어떤 곳에서, 얼마만큼의 햇빛과 바람과 물을 받고 자랐느냐에 따라서 어른이 된 나무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인별그램에서 나를 팔로우하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제 지겨울 듯한, 나의 빈번한 포스팅 소재가 하나 있다. 바로 집 공간배치에 관한 것인데. 주로 거실 공간 재배치를 자주 하는 편이고... (주 사용 공간이므로..)

그냥 뭐 살면서 한두 번 느낌 바꾸기 위해 가구 재배치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는 광적으로 가구 위치를 자주 바꾼다.

하나도 보태지 않고, 작년 연말에 현재 사는 집에 이사 와서 5월인 현재 대략 6개월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거실 전체를 15번 정도 뒤엎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오늘도 사실 살짝 바꾸고 싶은데 이미 너무 조합을 여러 번 변경해서 새롭게 해 볼 만한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그냥 견디고만 있는 중이다. 남편과 아이는 이제 너무 익숙해져서 내가 2미터 넘는 책장과 TV/인터넷 연결선 등을 혼자 다 바꾸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세팅되어 있는 거실을 보더라도 체념한 듯이


"엄마~? 또 바꿨어!?"


"아이고 좋아라~~ 나는 맨날 새 집에 사는 기분이네~~"


하고 한마디 하고 넘어가는 수준이 되었다. 심지어 남편은 한마디도 안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눈빛으로만 말한다.

'저거 저거 오늘 또 병 도져서 힘썼군. 어휴.'

이런 눈빛......


어릴 적 이야기를 지난 글들에서 쓴 적이 있는데, 제법 철이 들기 시작할 중학생이 되기 이전까지 나는 내 방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13살이 될 때까지 방 두 개짜리 집에서, 방 하나는 할아버지, 나머지 큰 방 한 곳에서 부모님, 남동생, 나 4명이 생활했다.)

그리고 사실 방 3칸짜리 집에 이사 와서도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했기에 당분간은 남동생과 같은 방을 썼던 것 같다.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서로 같은 방에서 옷 갈아입고 하기 민망할 나이가 되어서야 옷을 갈아입거나 할 때에만 방문을 잠시 잠갔고, 계속 남동생과 같이 방을 썼다.


내가 내 방이란 걸 가지게 된 건 내가 고3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3 특전으로 동생과 쓰던 방 하나를 내가 쓰고, 남동생이 부모님과 방을 썼던 것 같다. 할아버지 방은 너무도 좁아서 남동생이 할아버지와 같이 방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우리 남매가 정말로 작은 방 하나씩을 '정말로 소유'하게 된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내가 20대 후반인 시점이었다. 동생도 이미 한창 대학생활을 하던 성인이 된 뒤였으니

우리 두 남매는 '자기만의 공간'이란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처음 가져본 것이다.

대학 무렵, 블로그에 뭔가 일기 같은 걸 끄적이기 시작했는데

누가 잘 들어오지도 않는 나만의 온라인 속 공간이 나의 유일한 '내 공간'이었다.


그리고 첫 직장을 관두고 잠시 거제도에서 한 달을 산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엄청나게 큰, 이제와 떠올려보니 거의 20평은 되는 수준의 진짜 '빅 원룸'을 구했었는데 새로운 일의 압박감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단 한 달 만에 부산으로 돌아와 버렸다. 난생처음 하는 자취. 새로운 나만의 '집' (월세지만 ㅋㅋ) 그곳은 무서우리만치 컸다. 나에게 갑자기 그런 공간이 주어졌고, 뭔가 지긋지긋한 감이 있긴 했지만 가족의 품 안에서만 살다가 갑자기 방대한 양의 자유도 함께

주어졌다.

사실 미래를 장담하긴 뭣해서 침대 같은 걸 사기도 애매하고, 일단 가져간 요와 이불을 깔아 두었는데도 공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밤이면 혼자 잠드는 그 방이 너무나도 무서웠던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있다. 빈 공간은 모두 그냥 암흑이었고, 그 동네는 너무 조용하고 삭막하고 나는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곳에 갑자기 주 5일을 혼자 밥해먹고 견뎌야 하는 삶에 내던져졌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 '우물 속 바보 청개구리'로 자란 나는 이 거대한 무엇인가를 내 안으로 삼켜내지 못하고 금세 뱉어버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부산에 돌아와 속절없이 1년은 백수로 보냈다.


다시 일자리를 얻은 곳은 서울이었다.

28살이었나?

부산에서 2년간 다닌 회사에서 사회생활이란 걸 처음 경험하고, 무려 영국 출장씩이나 반년을 다녀왔지만, 수학여행 제외하곤 경상남도권을 거의 벗어난 적 없이 살아온 내게 27년 인생 처음 발을 디딘 그곳은 왠지 런던보다도 더 멀고 먼 느낌의 그런 곳이었다.

그것은 동경의 느낌이기도 했고, 두려움의 영역이기도 했다.

영국에 가면 나는 그냥 '너무나도 당연히 이방인'이지만,

서울은, '이방인이면서도 아닌 곳'일 곳인 것이 뻔했기에. 아마도 나는 나의 부산 사투리를 점차 숨기며 살게 될 것만 같았기에. 나는 두려우면서 동시에 설렜다.


그곳에서 구한 월세방은 아주 좁았다.

보증금 1,000에 40이었나. 2,000에 38이었나.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1년이나 꼬박꼬박 갖다 바친 돈인데도. 신림역과 신대방역 사이 어딘가. 롯데백화점 관악점 뒷골목 어딘가. 내 두 번째 직장에서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던 곳이었다.


거제도에서의 방에 비해서 그의 반의 반보다도 작아졌다. 내 몸 하나 뉘일 간이침대와 아주 미니미한 싱크대와 냉장고, 그리고 여름이면 곰팡이 냄새가 미치도록 났던 작은 벽걸이식 에어컨이 있던 방. 무엇보다 가장 짜증 났던 건 화장실 문에 턱이 없어서 샤워를 하며 샤워기 조준을 잘못했다간 문틈 사이로 물이 다 흘러넘쳐 방 중간 즈음까지 물이 주욱 흘러있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혼자 빨래란 걸 해보며 왜 도대체 이놈의 드럼세탁기는 빨래를 해도 해도 걸레 빤 쉰 냄새가 나는 것인지 (세탁조 청소를 안 해서 그런 것인걸 알턱이 없는 나는) 옷을 빨고 빨고 또 빨아 다시 말려 입곤 했다. 그래도 냄새가 가시질 않아 방안 작은 빨래건조대에 겨우 말린 빨래에 페브리즈를 뿌려 회사에 입고 가곤 했었다.


그 작은 공간을 요즘 젊은이들처럼 '원룸 꾸미기' '집 스타 그램'처럼 반짝반짝 '나만의 공간'으로 꾸며볼 생각은 할 생각조차 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눈곱의 눈곱만 한 월급으로  집세와 식비, 관리비 등을 내고 나면 나에게 허락된 사치란 6달 할부로 갖고 싶었던 외투 하나를 사는 것이나, 책 한두 권을 가끔 사는 정도였다. 그 집에서 내가 산 유일한 가구는 지금은 부산 친정에 있는 3단짜리 하얀색 싸구려 미니 책장과 TV를 보며 혼자 뭐라도 주워 먹을 수 있는 싸구려 밥상이었다. (밥상도 가구라고 할 수 있다면...)


1년을 어찌어찌 겨우 버텼다.


이놈의 회사를 또 때려치우고 싶어 궁뎅이가 들썩거렸지만 29살의 거의 무경력에 가까운 나를 받아줄 회사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부산에서 2년 한 일, 서울에서 1년 한 일의 조합이 별로였고,그와 관련된 일을 계속해나갈 자신이 점점 사라지던 시점이었다. 엑셀은 나를 자주 미치게 했고, 야근은 내 정신과 신체를 갉아먹었으며 더 이상 할부로 뭔가 산 것 때문에 회사를 다니는 일을 그만하고 싶었다. 남들처럼 이제 와서라도 (아마 당시에 만 30세까지만 된다던) 워킹홀리데이라도 훌쩍 떠나볼까.

아마 나에게 그런 '혼자 힘들게 살아남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뭔가 지속적으로 하는 걸 힘들어하는 성격이 된 것일까. 부자도 아닌 집에서 알바 한번 제대로 안 하며 생활력 따위 1도 없이 캥거루족으로 살아온 것일까. 당시에 치열하게 (아마도...)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을 하던 그 시기에 슬로바키아에서 날아온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


(여기에 생략된 수많은 이야기는 나의 두 에세이 <님아, 그 선을 넘지 마오>와  <이혼하고 싶어질 때마다 보는 책>에서 자세히 읽으실 수 있으니 지면을 생략한다. 그리고 쓰다 보니 이미 지면을 너무 많이 쓴 것 같다. 그리고 이미 주제를 이탈해 삼천포로 간 것 같기도... )


........................





그리고 그 작디작고 더러운 신림동 원룸 다음에 나에게 생긴 공간은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하고 남편이 보내주는 사진 몇 개를 받아보며 선택했던 것 같다. 먼저 영국으로 나간 남편이 집을 구해 계약한 뒤 내가 영국으로 들어갔기 때문.


신혼집을 꾸미며, 모든 가구를 IKEA에서 사다 날라 조립해서 썼다. 침실 하나와 주방, 화장실 하나씩, 그리고 굉장히 넓은 거실이 있는 영국식 카펫이 깔린 플랏(빌라 같은 저층 아파트)의 1층이었다. (영국은 지상층은 ground층인가???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 다르게 불러서 우리의 2층을 1층으로 부른다.) 서울 자취방 다음이 거기라니, 장대한 발전이었다.

하지만 그 집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큰 침실에 큰 붙박이장이 있었는데 붙박이장 문 거울로 되어 있었고, 아파트 구조상 침실 창문을 열면 옆집 주방 창문을 볼 수 있는데, 붙박이장 거울에 비칠 우리 모습이 자꾸 신경 쓰였달까...(ㅋㅋ)

자주 블라인드를 쳐놓아야 했고, 거실에는 해가 잘 안 드는 공간이 많아 어느 날 짐 더미를 치워보았더니 창가 밑에 곰팡이를 넘어 이끼가 비슷한 게 자라고 있어 경악을 했는....................


아무튼 그곳에서 2년 반을 살았다. '이사 = 엄청난 비용'이었기에 선택사항이 없었고 다행히 그 정도면 매우 젠틀한 집주인을 만나 한 번인가 두 번 집세를 조금씩 올리는 정도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내가 살았던 곳은 네덜란드의 레지던스 호텔룸이다.


그다음은 대전의 시가 근처 작은 복도식 아파트


그다음이 서울 전셋집


그다음이 용인 전셋집 (새 아파트에 처음 들어간 것이라 좋았다.)


그리고 그다음이 지금 사는 서울의 집이다.



어려서부터 내가 거쳐온 공간과 마침내 내가 정말로 가지게 된 내 공간에 대해 쓰다 보니 굉장히 많은 역경이 있었던 것만 같지만 역경을 거쳐서 이 나이에 서울에 집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니 나는 대성공을 거둔 것일까?

은행 지분이 99.99999999999 프로라서 사실 내 것이란 실감이 거의 나질 않는 이 집을 두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부럽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끊임없이 이 집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내가 이 정도의 크기와 위치를 가진 공간이 나의 소유인 것에 대한 마음, 즉, 나는 이 정도보단 더 좋은 공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언제나 (아마도 태초부터) '공간에 대한 이상향'을 가진 사람이어서 인 것 같다.


언젠가 살고 싶은 집, 그리고 그 속에 있을... 나만의 공간에 대한 상상을 자주 한다.

그곳에는 조용하지만 애교 있는 고양이도 한 마리 있으면 좋겠고, 나무와 풀과 꽃이 있으면 좋겠지만 벌레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모순되는 상상도 한다. 햇살은 (여름에 덥더라도) 많이, 길게 들어오면 좋겠고, 창은 크고 통창이면 좋겠다. 10~15층 정도의 뷰를 가진 아파트도 좋을 것 같고, 앞동 뷰가 아니라면 저층도 상관없을 것 같다. 대도시에 있지만 조금 변두리에 있는 2층 주택도 좋을 것 같다. 잔디는 부담스럽고 화분들을 둘 만한 간만 조금 있으면 좋겠다. 볕 좋은 날 일광욕을 즐기며 책 두어 장 읽다 잠들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평상을 둬도 좋을 것 같다. 날씨가 좋은 계절에 가끔 친구들을 불러 술 한잔도 하고, 나 혼자 조용히 새벽녘에 잠이 안 올 때 나와 밤하늘을 볼 수도 있을 만한 그런 곳.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 우선순위를 정해서 그중에서도 가성비를 고려해서 공간을 꾸미게 되겠지만. 그 최소한의 공간을 내가 원하는 데로 '선택'해서 꾸밀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정말로 행복할 것 같다.




이 지구 상에 내가 온전히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작은 공간 하나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것은 달리 말하면 내가 이 지구에 존재해도 된다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정도의 공간을 소유하며 살아도 되는 존재라는 뜻일 테니까.


내가 원하는 공간을 가진 것이 내가 계속 살아가도 된다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이유를 찾아가고 싶다.

남은 삶이 슬프건, 때론 행복하건, 괴롭건, 뭐 어쨌든 간에 그 모든 희로애락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 있기를.


내가 지구에, 대한민국에, 그 시점에, 하필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가 있기를.

그래서 나는 오늘도 꿈꾼다.

완벽한 나만의 방을 찾는 그날을.

그 공간에서 내가 잠시 머물다가 가도 되는 그런 사람이기를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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