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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Oct 13. 2020

#8.누굴 닮았나

“아이고, 제 아빠 빼다 박았네그려.”


“제 아빠 어릴 때랑 똑같잖여. 여기 코랑 입이랑 영판 제 아빠여. 깔깔깔.”


명절날 시가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딸아이를 두고 나누는 대화다. 첫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속설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 역시도 아빠를 닮았다. 그런데 아이가 아빠를 닮았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 나는 왜 그렇게 듣기 싫은 것인지. 시집이라고 별말 아닌 것도 부정적으로 듣는 내가 꼬인 걸까. 아니면 출산하면 나온다는 호르몬 탓에 예민해진 걸까.


이유 없는 속상함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내 인생에 다시는 임신은 없다며 하루 열댓 번씩 변기통을 부여잡고, 남편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며 위액까지 토했던 입덧. 살이 쪄 이중 턱이 되고 배와 허벅지에 보기 싫은 튼살이 생긴 생소한 거울 속 내 모습. 배 속에서 커진 아이가 폐를 압박해 숨 쉬기도 힘든데 뒤뚱뒤뚱 겨우 걸음을 옮기던 만삭의 기억.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끔찍한 진통과 결국 배를 찢고야 아이를 만난 일까지. 온갖 고생은 다 거쳐 아이를 낳았는데 나 닮았단 소리를 듣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물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남편의 어릴 적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는 시가 쪽 어른들이 내 아이에게서 제 아빠의 옛 모습을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닐 터이다. 문제는 어쨌든 며느리로서 듣기 싫은 그 소리가 점점 진화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신생아기를 지나 배밀이를 하고, 앉고 걷는 등 하나둘 새로운 영역을 넓혀갈 때마다 시가 식구들만의 희한한 기준이 적용된다. 잠투정이 심해 재우기도 힘들고 밤엔 시간마다 깨서 너무 괴롭다고 하면


“아이구, ‘우리 아들’은 눕혀놓기만 해도 알아서 잘 잤는데 얘는 누굴 닮았냐?” 라는 말이 나온다.


이유식에 무엇을 넣든 잘 먹는다고 하면 “넌 가리는 것도 많더니 식성은 ‘우리 아들’ 닮아 키우기 수월하겠다.” 하신다.


잘난 것은 모두 아들을 닮고, 못난 것은 모두 며느리를 닮았으니 잘난 아드님을 부족한 며느리와 결혼시켜 그리도 항상 못마땅하신 걸까.

한번은 시아버지가 또 농담이랍시고 애 걸음 늦는 걸 시비 삼기에 정색을 해버렸다.


“‘우리 아들’은 돌잔치 때 뛰어다녔는데 얜 누굴 닮은 거냐? 혹시 너네 집안 애들은 늦게 걸었냐?”


“아버님! 자꾸 그러시면 저도 기분이 안 좋아요. 저는 웃기지 않아요.”


순간 민망한 공기가 방 안을 채웠고 시아버지는 머쓱해했지만, 참다 참다 그 말을 던진 나는 꽤 속이 후련했다.


웃으라고 하는 소리는 모두가 즐거워야 진짜 농담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웃기는 소리일 뿐.

‘우리 아들’이 선택한 사람, 며느리도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셨다면, 이 새로운 가족만 슬프고 속상한 일이 없도록 배려심 있는 언어를 사용해주면 정말 좋지 않을까.



*이 글은 '본격 며느리 빡침 에세이' <님아, 그 선을 넘지마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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