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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Feb 24. 2023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한 문단 읽기

5시간 동안 10줄 읽기 쌉가능 (feat. INFJ)

요즘 재밌게 읽고 있는 에세이를 보다가 현타가 몰려왔다.

난 정말이지 피곤한 인간 유형이다.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 수밖에 없게 프로그래밍된 채 태어나버렸다.

 

한 문단에 진입하여 읽기 시작해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는데 수억 분이 걸린다.

한 문장에 담긴 조사와 단어들을 잘근잘근 곱씹지 않고 수월하게 넘어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

거의 모든 것에서 다른 사유 (또는 잡생각 혹은 망상)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문장 전체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이해하고 난 후, 다시 문맥을 되찾고 원래 글을 읽던 흐름으로 돌아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한데, 이 꼬리를 물고 물고 늘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글로 한번

써보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나는 아래 문단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세일러 마스를 좋아했다. 전투에 방해가 될 만한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전투는 물론 일상생활조차

힘겨울 짧은 치마와 코르셋 톱, 하이힐 차림을 한 외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연습장에 세일러 마스를 따라 그리면서 나는 심지어 원작보다도 더 여체를 왜곡했다. 가슴은 더 크게, 허리는 더 얇게, 치마는 더 짧게. 하지만 팔다리는 더 더 더 길게. 그게 더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원작도 이런 모습이면 좋을 텐데'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과연 코르셋엔 '빠꾸'가 없었다."


<떼인 근력 찾아 드립니다.> p.75

 -샤크 코치+에리카 코치 지음 by 위즈덤하우스


그리고 아래 문단은 하나의 예시이다.

위 문단 하나를 읽으며 내 머릿속에서 뻗어나가는 망상의 꼬리들을 글로 옮겨보았다.



박식빵의 머릿속 상황..


'세일러문 얘기라니 사실 조금 식상한 감도 있긴 하지만... 꽤 흥미진진하군... 후후후. 초등학교 6학년때였나? 한창 여자애들끼리 죽어라 보기 시작했었지... 그러고 보니 나는 누구를 좋아했더라? 역시 주인공인 세일러문? 단발머리 세일러 머큐리? 아 맞다.

기본 5명 이외에도 점점 태양계 행성 끝까지 채웠다가 다른 은하계에서 온 그런 존재도 나왔던가????

아 그런데 명왕성은 이제 태양계 아닌데.. 세일러문 전체 수정해야 하나 ㅋㅋㅋ 근데 세일러 명왕성? 세일러 플루토? 어떻게 생겼더라???


아 맞다. 다시 책 읽어야지.

(뒤적이던 네이버 검색창을 닫는다.)


"전투에 방해가 될 만한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어쩌고 저쩌고......."

그렇지... 특히 일본에서 건너온 여전사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잘록한 허리에 기나긴 팔다리를 가져서 마치 마론인형 같긴 했지...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세일러문 말고 웨딩피치랑 천사소녀 네티도 절대 빼놓을 수 없지...... 카드캡터 체리도 있고... '오늘 밤엔 무슨 일을 할까~ 누구에게 기쁨을 줄까~ 나쁜 마음 끝이 없는 욕심~ 멀리멀리 사라지면~~~~~' (천사소녀네티 OST)


아.. 이런 미친.. (자학)

다시 읽어야지..



"가슴은 더 크게, 허리는 더 얇게, 치마는 더 짧게. 하지만 팔다리는 더 더 더 길게. 그게 더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중고딩 시절엔 그랬다. 한없이 왜곡된 애니메이션 속 여체와 툭하면 부러질 듯한 여자 아이들들의 모습을 동경하고, 중3 무렵엔 이미 완성된 퍼펙트한 키 168cm에 50kg 정도 나갔던.. 지금 기준에선

아주 마른 몸이었는데... 내가 가지지 못한 여리여리한 종아리를 가진 친구들의 다리를 훔쳐보며

미친 듯이 부러워했다. 대학생 때 한동안은 종아리성형술을 마구 검색해보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여중생들이 그랬다. 그리고 다리미로 쫙쫙 편듯한 반듯하고 찰랑이는 생머리가

유행이라 너도나도 엄마를 졸라 (20년도 더 전인 그때.. 비싸면 10만 원도 하곤 했던) 스트레이트펌을

하러 갔었다. 곱슬머리였던 반 친구 하나가 다음날 찰랑찰랑으로 등교하면 모두가 그 아이에게 달려가

어디 미용실에서 얼마 주고 했냐고 묻곤 하던 시절이었다.

출처pixabay



약 25년이 흐른 지금은 아주 많은 것이 바뀌기도 했고 페미니스트들이 탈코르셋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뼈말라', '거식증' 같은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생겨 많은 여성의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다.


아. 그렇지 나 책 읽고 있었지.

이 책은 동시대 여성이 쓴 거라 그런지 참 재밌고 웃음 뽀인트도 많고 찰진 표현들이 많다. 샤크 코치, 에리카 코치라고? 작가님들 본명은 뭐려나? 샤크짐을 운영하신다고 하네.

머리 짧고 어두운 색 피부의 과체중 근육질 여성분이라니 솔직히 진짜 외모가 궁금해진다.

사업을 하시고 마케팅도 하셔야 할 테니까 아마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을 것이다. 찾아봐야지!


그렇게 인스타그램의 바다에 빠져서 약 15분을 그냥 흘려보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책으로 돌아와 다음 문장으로 겨우겨우 넘어간다.


이 과정을 세 번 즈음 반복하고 나면 그제야 이 꼭지의 내용에 집중하고

 책을 조금 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이렇게까지 로딩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 챕터를 끝내고, 책 한 권을 다 읽게 되니

책 한 권을 모두 읽어내는 것은 나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에세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예를 들어 너무나 취향인 남미 쪽 소설 작품 같은걸 어쩌다 만나게 되었다.

나는 아름다운 문장 하나하나마다 말을 덧붙이며 책 전체에 대한 리뷰(책 분량의 세배쯤 되겠지...)를

써 갈기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겨우겨우겨우겨우겨우 책의 재미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드는 듯이 스스로

암시를 걸며 험난한 고비고비를 넘어 책 읽기를 마친다.

만약 그 엄청나게 재밌고 내 취향인 소설을 끝낸 시점이 애석하게도 새벽 3시라면

나는 리뷰를 쓰지 않고는 잠을 못 잔다.......... 머릿속에 온갖 찬사들로 가득 차서 말이지.....

뱉어내지 않고는 잠이 오질 않는다.


그래서 나이도 들고 체력도 더 약해지면서는 에세이 위주로 읽고 있다.

이 망할 놈의 프로그래밍을 아예 공장초기화해서 갈아엎고 산뜻하고 정리정돈 잘되는

프로그램으로 새로 깔고 싶다..

그런데 과연 그런 방법이 있긴 한 걸까?


새로운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기쁨과 동시에 절망을 느낀다.



ㅠㅠ

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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