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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Mar 11. 2021

곱게 늙어야지

지하철 진상남을 보며

오랜만에 지하철 탈 일이 생겨 얇은 책 한 권과 블루투스 이어폰을 챙겨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분당선은 처음 타봤는데 배차간격이 원래 이렇게 긴 것인지 옷을 얇게 입고 나가 추위에 떨다가 체감시간 30분, 실제론 10여분? 만에 지하철에 올랐다.


앉을자리가 없어 문쪽 빈 곳에 서서 이어폰을 낀 채 책을 읽고 있는데, 근처에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서 자리를 세 자리나 차지하고 뭔가 종이뭉치에 열중하여 있는 것을 보았다. (단정한 차림에 체크무늬 베레모를 쓰고, 뭔가 글을 읽고 있는 걸로 봐서 사건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대학교수님처럼 보이는 노신사였다.) 비스듬히 앉아 종이 더미를 읽으며 펜으로 체크하느라 두 칸을 차지하고, 나머지 한 칸은 자신의 서류가방을 올려놓았다.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그 가방 대신 앉아볼 요량으로 그 할아버지 앞에 서서 차마 말은 못 하고 눈치를 주었으나 그 할아버지(이하 '진상남')는 못 본 건지 못 본 척한 건지 그냥 자기 일에만 몰두했고 아주머니는 다른 곳으로 가버리셨다. 그리고 사건은 다음 역에서 벌어졌다.


그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그 앞에 서더니 "가방 좀 치워주쇼. 앉게."라고 한 것이 발단이 되어 진상남은 온갖 상스러운 소리를 해가며 그분을 모욕하고 몰아세운 것이다. 방뀌 뀐 놈이 성낸다더니 완전히 그 꼬락서니였다. 자기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방해를 한다는 식이었다. 심지어는 "이명이 지 형수하고 하는 말 같은 소리 해대네!" 같은 요상한 욕(?)까지 하고 뭘 잘했다고 큰소린지 열차 한 칸이 떠나가라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너 같은 놈이랑 얘기 안 한다며 일어서서 다른 칸으로 가는가 싶더니 열 보 떨어진 노약자석의 빈자리로 가 앉아서 계속 씨불이는 게 아닌가.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요즘 늙어감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 딱 두 가지만 잘해도 백점 만점에 90점은 먹을 것 같다.

젊은 사람들에게 오지랖 부리지 않기.

(=쓸데없이 끼어들거나 많이 살았으니 내가 더 많이 안다는 생각에 요청받지 않은 충고나 조언하지 않기)

그리고 오늘 본 진상남 같은 진상되지 않기.(=곱게 늙기)

과연 잘할 수 있을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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