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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May 19. 2023

17화. 대기업 입성

배신감을 양분 삼아

이전보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여 새로운 회사생활이 시작되었다.

지난 회사와 다른 점이라면 그래도 이전에는 명목상 해외영업팀이라 영어를 쓸 일도 가끔 생기고, 전략, 기획 같은 거시적인 일을 하기도 했는데, 이번 회사에서의 일은 전국에 퍼져있는 판매망을 총괄하는 식으로 관리하는 직군이었기에 영어를 사용할 일은 없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주로 해외 본사에서 내리는 지시사항을 대리점에 전달하거나 그들의 요구사항을 취합하거나, 그 회사 제품의 한국 국내시장 Distributor로서 판매와 영업망을 관리하는 중간 단계 관리자랄까.

사실 커리어를 교묘하게 포장하는 면접에서의 꼼수가 통하여 이직에 성공하였고 연봉도 올려 받게 되긴 했지만, 막상 입사하여 일을 해보니 해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긴 했다.

뭐 이곳에서는 얼마나 있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의 일을 해보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나쁘지는 않았고,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어울리는 내 성격과도 잘 어울리는 점이 있기도 했다. '내가 낸데.' 하는 충만한 자신감 하나로 여태 살아왔건만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고난을 겪으며 그런 본성이 많이 죽어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새로운 업무는 크게 어렵다거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은 아니었고, 업무에 점차 적응하면서는 계속해서 심해지는 코로나 상황과 함께 재택근무를 자주 하게 되었다.

고로 사실 이전보다 훨씬 시간과 자유는 많아졌다고 느꼈다.


그간 이직과 이사의 험난한 과정을 겪었지만 2년 뒤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며 우리의 상황은 조금씩 안정되는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와 아이가 어릴 때는 육아에 전념하던 아내 수연은 점차 본인의 꿈을 찾아가는 길을 택했다. 대학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더니 글을 쓰는 작가가 된 것이다.

영국에서 신혼생활을 할 때부터 언젠가 책을 내보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으나 솔직히 말하면 정말 해낼 줄은 생각지 못했기에 그녀가 대단하기도 하고 내가 잘 못하는 창작이나 글쓰기란 분야를 잘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멋있을지 몰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가난하기만 한 이 직업이 우리의 경제 상황에는 도움이 거의 되지 못했기에 점점 더 맞벌이를 할 만한 상황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조금 섭섭하거나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으로서 그녀만이라도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지원해주지는 못하는 상황이 미안하기도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가끔 주변에서 같이 회사를 다니는 맞벌이 부부들이 우리보다 훨씬 나은 형편으로 여유롭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우리는 왜 저렇게 못 살지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나오기도 했다. 그런 못난 마음이 들 때엔 괜히 서로를 건드리다가 다툼이 되기도 했다.


뭐 어쨌거나 수연도 한국에 돌아와서 본인이 할만한 일을 찾긴 찾았고, 아이도 문제없이 잘 크고 있고, 잊을만하면 '밀접접촉자'가 되거나 의심사항이 생겨 코를 쑤셔대야 하고, 외출할 때면 한여름 무더위에도 마스크부터 챙겨야 하는 이 망할 코로나 상황은 짜증 나고 괴롭긴 하지만 나한테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닌, 이 세상 사람 전부에게 해당하는 사항이니 참을 만했다. 설마 이 역병이 아무리 지독하다 한들 3년이 가랴, 10년이 가랴.


그렇게 이전상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나날이 1년 가까이, 최소한 연말을 넘어, 인사 시즌이 시작되는 연초까지는 이어지는 듯했다.

회사 업무 파악도 끝났고, 팀장이나 팀원들과도 꽤 친해졌고, 내가 맡은 일도 문제없이 잘해왔다고 생각했기에 경력직으로 중간에 팀에 합류하긴 했지만, 승진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문제였을까.

입사 면접을 볼 때 과장 말년차로 직급을 확정 지으며 큰 무리가 없다면 다음 해에 승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내 뒤통수를 친 것은 다름 아닌 사람 좋아 보이기만 했던 팀장이었다.


나와 나이 차이가 몇 살 나지 않는 젊은 나이의 팀장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가 진급해서 자신의 위치에 위협에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인지, 사실은 속으로 나를 탐탁지 않아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인사고과에서 C를 주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이 회사 진급체계는 직급 상사에게 C를 받으면 다른 점에서 아무리 만회한다 해도 당해에 승진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승진 누락과 함께 앞에서는 웃으며 나에게 일을 시키던 팀장에 대한 배신감이 몰려들었고, 과연 내년에는 승진이 가능하긴 할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1년 가까이 일을 해오며 이 일이 이전에 하던 것보다 훨씬 쉽기만 하고, 상대적으로 재미없고, 커리어에는 도움이 안 되는 직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나는 또 슬금슬금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1년 정도 채웠으니 만 1년 찍으면 다시 한번 연봉 점프해서 이직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타이밍인 것도 같았다. 

그 어떤 이유보다도 사람을 뽑을 때는 다음 해에 승진시켜 줄 것처럼 사탕발림을 해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 화가 났다. 물론 1년 뒤의 일을 인사팀이나 팀장이 어떻게 장담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사실 나 몰라라 해도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긴 하지만, 나의 이 상처받은 마음은 누가 보상해 주나. 도저히 이 마음으로는 더 이상 이 회사에 머무를 수 없겠다는 마음이 샘솟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구직사이트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1년 전 한번 연봉점프를 한 덕에 그래도 지원해 볼 만한 회사의 폭이 넓어진 것도 같았고, 만약 정말로 한 번 더 이직을 하게 된다면, 이참에 이 업계에서 작은 회사의 팀장급으로 직급을 점프해서 가거나, 대기업 입성을 시도해 볼 만한 마지막 기회라고 볼 수 있는 나이이기도 했다. 주변을 봐도 마흔이 넘어가거나 차장급 이상이 되면 이직이 지금보다 좀 더 어렵고 까다로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회사의 이력을 추가하여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손 보고 또다시 여기저기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올해 말로 다가온 아파트 입주에 대비하려면 목돈이나 더 높은 연봉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것은 충분한 동기가 되어주었다. 처음 한국에 와서 원서를 썼을 때에 비하면 내 커리어가 그래도 쌓이긴 한 모양인지 연락 오는 회사가 늘었다. 보통 실무진과 보는 1차 면접은 쉽게 통과하는 편이었는데 문제는 최종면접이었다. 마지막 벽을 넘어야만 최종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한 외국계 회사에서 매니저급 포지션으로 1차 면접을 통과하고 2차 면접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평일 밤, 피곤한 몸을 이제 쉬게 하려고 침대에 몸을 뉘인 10시 반 즈음 1차 면접을 봤던, 아마 입사하게 된다면 직속 상사가 될 사람이지 싶은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리 전형 중이라지만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라니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계속해서 벨이 울리자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김민준 씨. 나 요전에 면접 봤던 OO사 XXX부장인데, 나 지금 여기 압구정 어디에서 술 한잔하고 있는데 나올 수 있겠나?"


이게 무슨 일이지.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인터넷에서나 보던 '술자리면접'인가? 요즘에도 그런 걸 하나? 심지어 여기는 외국계 기업인데. 말도 못 할 꼰대 스타일이었던 건가. 아무튼 전형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면접을 본 사람이 부르는데 시간이 몇 시인지가 무슨 상관이 있겠나. 무슨 일인지는 가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일단 가보긴 해야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 그가 있다는 술집에 갔더니 맥 빠지게도 그냥 술 한잔 하자고 불렀다며 한 잔을 권한다. 면접의 연장선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와서인지 긴장이 되었지만 마음을 편하게 먹고 최대한 예의만 차리도록 노력하며 술자리에서 밤이 늦도록 자리를 지켰다.


그는 면접에서 봤을 때와는 좀 다른 사람 같았다. 진상 중의 최고진상이라든가 말도 못 할 꼰대라든가 정도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질문을 한다든가 기분 나쁜 단어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냥 느낌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해서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그랬는지, 원래 그런 사람인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그 자리를 나오며 오히려 내가 그 사람 밑에서는 일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별로인 말만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이 딱 그랬다. 네덜란드에서의 황 부장이 떠오르기도 했다. 연봉을 얼마를 주든 왠지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 후회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찝찝한 기분과 함께하며 이후에 최종면접을 진행했고, 최종합격했다는 통보를 들었다. 그때 다른 대기업 한 곳에서도 전형이 진행 중이었는데, 아직 최종결과가 나오지 않아 최대한 시간을 끌며 연봉협상을 하려고 했다. 이 대기업에서 만약 최종합격을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여기라도 가야 하겠지만, 대기업에 합격한다면 이곳은 뒤돌아볼 필요도 없기에 막판까지 가슴을 졸이며 마지막 결과를 기다렸다. 외국계에서는 지금 회사보다는 높은 연봉과 좋은 복지혜택을 제시했지만, 나쁜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었기에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해서 더 나머지 한 곳의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결과가 나왔다. 두 회사를 두고 선택하는 입장이 되어보다니 내 생애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나는 기다리던 대기업에서도 최종합격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외국계에서 연봉협상을 거의 마무리지으며 시간을 끌고 있었던 덕분에 나는 그 회사의 협상 내용을 조금 흘리며 현재 내가 저울질을 하는 상황임을 은근슬쩍 내비쳤다. 대기업 특성상 연봉테이블이 거의 정해져 있고, 크게 변동사항이 있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갑의 위치 비슷하게라도 있어본다는 느낌이 좋았다. 이렇게 이직왕이 되어가는 건가.

실제로 내 능력치나 커리어가 어느 정도인지 뭐 그런 것은 차치하고라도 결국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이상 내 몸 값은 내가 올리고 내 가치는 내가 올려 받는 것이다. 입사하고 나서는 어떤 결과를 내든 어떻게 일하든, 솔직히 말하면 그건 그 이후의 문제이다. 한번 계약서에 명시된 숫자로서의 내 가치는 그대로 박제되어 그 숫자에서 다시 내려올 일이 없게 된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 돌아온 지 5년 차에 두 군데의 회사를 거쳐 세 번째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5년 전이나,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10여 년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연봉을 받으면서 말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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