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 10)
잠시 왔다가
흩어지는 인생
빈 지게와 다름없어
허허롭고 가볍게
모든 것은
자연으로의 귀로였나니
갑술생 윤각* 씨
천상에 가면
아픔 없고 괴로움 없이
좋은 날 좋은 시에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영생극락하옵소서.
엄마가 하루종일 홀로 집을 지키고 있을 때, 아버지는 요양병원 침대에 몸이 꽁꽁 묶인 신세였다. 아버지가 살가죽이 축 늘어진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망연자실할 때, 엄마는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아버지를 꿈속에서조차 기다렸다. 함께해 온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엄마가 눈물 글썽일 때, 아버지는 초점 없는 눈으로 회색 천장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가 응급실로 들어가던 날은 멀쩡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기침을 하는데 숨을 쉬지 못해 구급차를 타고 들어갔다. 떠나면서 밥 한 술 못 뜨고 가신 게 두고두고 엄마 가슴에 한을 남겼다. 그날 이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내는 의술 좋은 이 시대에 누가 그럴 줄 상상이나 했을까. 당연히 건강하게 걸어 나오실 줄만 알았지.
숨을 쉬려고 기관지 삽관을 한 아버지는 정상적인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입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음식이 들어가는 기막힌 상황을 지켜보는 엄마의 심정은 갈갈이 찢어지는 듯했다. 또한 죄스러움은 가족 모두의 몫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버지한테 금식 명령이 떨어졌다. 먹는 것이라고는 콧줄을 통해 흘러들어가는 물처럼 멀건 죽이 고작이건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금식은 막아설 도리가 없더구나."
자꾸만 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신 것 같다고 하시는 엄마. 심심찮게 들려오는 요양병원의 실태 중 하나가 밥을 굶긴다는 것과 때린다는 내용이다. 스스로 용변 처리를 하지 못하니 간병사의 손이 많이 필요한데 밥을 많이 주면 뒤처리가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설마설마했지만 그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엄마의 말에 수긍이 간다. 자꾸 때린다고 하셨지만 아무 힘이 없는 노인을 왜 때리겠냐면서 간병사를 두둔했었는데. 물론 심한 폭행은 아니었다 해도 그 많은 환자를 모두 지극정성 돌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말이 잘 안 통할 때나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은 줄이나 장갑을 풀려고 할 때 때렸을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누워서 손칠판에 쓰셨던 게 사실이었던 것 같다.
'막 때려.'
'물만 주고 밥을 굶겨.'
중국인 간병사를 가리키며 손칠판에 매직 든 손으로 삐뚤빼뚤 글자로 썼을 때 나는 아버지를 다독였다. 그럴 리가 없다고. 사실이라 해도 어떻게 따질 수가 있을까. 면회를 마치고 우리가 떠나면 아버지 혼자만 덩그러니 병실에 남아 있을 텐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말씀을 허투루 듣고 만 것이 후회된다. 어차피 가실 걸 집에서 편안하게 모셨더라면 그런 수모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래도 저래도 뼈아픈 후회만 여전히 자식의 몫으로 남는다.
하루가 다르게 점점 스러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인생처럼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낙담했다. 면회 갈 때마다 머리맡에 서서 얼굴을 쓰다듬어주던 엄마는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았는지 중얼거리곤 했었는데.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강하게 마음먹고 얼른 일어나서 우리 조금만 더 삽시다."
자식들이 이렇게 효도하고 있으니 아주 조금만 더 살아보자,는 평소에 늘 하던 말씀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졌다.
결국 가족의 정성 어린 보살핌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아버지는 다시 못 올 먼 길로 가셨다. 아흔 인생 무리 없이 잘 살았는데 '금식'이라는 눈물겨움으로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아버지에 대한 차고도 넘치는 애통함을 가슴에 묻은 엄마는 모든 것은 자연으로의 귀로였다면서 쓸쓸한 웃음 짓는다.
"인생이란 빈 지게인데 왜 그리 담으려고 아등바등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