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선여인 Oct 22. 2023

스무 살에 시집왔네

(엄마의 시 8)



스물에 시집왔네


내 나이 스무 살에

숙맥으로 시집와


시부모 모시고

남편 수발에


자식들 뒤치다꺼리로

정신없이 달려오다가


이제야 되돌아보니

저만치 할망구가 서 있네.




엄마는 선도 안 보고, 사진 한 장 교환 없이 결혼했다. 아버지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대학을 다닌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산 이 씨 양반 가문에 사위로 들였다.

상투를 튼 완고한 할아버지의 엄한 가정교육 아래, 둘째로 태어난 엄마는 학업에 대한 열망이 컸다. 하지만 여자한테는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시대인지라 자연스레 집안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한의원을 하며 한학 공부도 하던 할아버지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곁눈질로 한자를 익힌 엄마는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양쪽 집안이 모두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엄마네 집은 양반 가문의 체통을 지키면서 인심이 좋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시집을 온 엄마가 힘들어했던 것은 가난이 아니었다. 자라온 환경이 너무 달라 적응하기가 힘들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남에게 무조건 베풀며 선을 쌓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기에 남 주기에 인색한 시댁 분위기가 무척 낯설었다고 한다.


대학 출신자라고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거듭된 사업 실패로 엄마는 생활 전선으로 나서야 했다. 성실을 바탕으로 지독하게 아끼면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서 자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일에 파묻혀 살았다. 곁에 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테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 의지할 대상이 있었기에 그 힘듦을 이겨낼 수 있었다. 지금껏 평범한 삶을 잘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수렁에 빠져버린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엄마는 아침부터 할망구가 되었다는 노래를 하며 인생무상에 푹 빠져 있다. 아버지가 떠나고, 이제는 뒤를 따라가야 한다면서 지난날을 회상한다. 숙맥으로 시집왔지만 시부모 모시고 자식들 잘 키워 온 지혜로운 분이다. 지금껏 집안을 잘 일궈왔기에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가난을 포용하고 너그럽게 이해하면서 결혼생활을 슬기롭게 이어왔다는 건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엄마가 말하듯 이제는 할망구가 되었다. 이제는 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는 나이다. 자식도 걱정하지 말고 못 사는 친척 걱정도 하지 말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면 그만인 나이다. 제발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말고 나 자신의 몫도 챙겨가면서 스스로를 아껴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인생, 앞으로는 엄마만을 생각하면서 소중하게 가꿔나가기를 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