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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제주스럽다

by 청량

제주에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있다.

“귤 좀 보내줘!”

그만큼 제주와 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같다.


우리 가족도 귤을 참 좋아한다.

제주까지 왔으니 마음껏 먹고 싶어서 귤을 좀 싸게 사볼까 했는데, 생각보다 귤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 제주에서는 ‘당근마켓’이 답이라는 것!

귤을 직접 수확해도 된다는 글을 발견하고, 우리는 신이 나서 바로 그 농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주인장은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귤 농장이라기엔 귤은 팔아 먹고사는 분의 포스가 아닌 느낌이랄까. 이야기를 나눠보니, 서울에서 살다가 제주로 내려와 귤 따는 것을 좀 해보고 싶은데 경험이 없다보니 알바자리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까짓것 내가 밭을 사지” 해서 직접 작은 귤밭을 사게 되었다고 했다.

제주의 귤이 당연한 풍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새로운 시작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


귤밭에서 우리는 두 콘테나나 채웠다.

계획은 하나였는데, 따다 보니 맛있어서,

또 싸니까… 자꾸 손이 갔다.

아이들도 신이 나서 하나씩 따 먹고, 바구니에 담고, 다시 따 먹고.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언제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손을 뻗어 뭔가를 ‘따는’ 순간이 있었던가. 그동안은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손끝조차 힘을 잃었던 것 같은데. 나는 지금, 귤을 따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귤을 따면서,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귤을 한가득 싣고 나오려는데, 주인장이 자기 펜션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반갑게 혹시 들러서 구경해도되냐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을 하고 따라오라며 길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애완견 뿐아니라 똑똑하고 말잘듣는 애완닭이 있었다.

아이들은 닭을 쫓아다니며 깔깔 웃고, 나는 따뜻한 유정란을 손에 쥐었다.

방금 전까지 귤밭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우리는 어느새 그 공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귤을 가득 싣고 나오는 길, 아이들은 귤껍질을 까먹으며 “오늘 진짜 재밌었어!”를 연발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를 보며 달렸고, 잠깐 내려 모래밭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바닷물 가까이 들어간 첫째가 보말을 발견했다.

“엄마! 여기 성게도 있어!”

보말을 잡겠다며 계속 엎드리다가 발을 잘못 디뎌 제주 해변 그 까만 현무암에 손목이 까져 피가 났다.

피나는 것은 뒷전, 놀기 바쁜 첫째. 뭐든 열심히 하는 열정적인 친구다.


집에서 먹자니 저녁이 늦어질 것 같아 밥집을 찾았다.

유명한 식당들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오히려 사람이 덜 몰리는 곳을 찾는다.

이름이 ‘땡땡식당’이라든가, ‘누구누구네’ 같은 곳이면 더 신뢰가 간다.

오늘도 그런 곳을 발견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며, 남편과 아이들이 귤밭에서 열중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여행을 떠나온 게 아니라 일상을 회복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무겁게만 느껴졌던 하루하루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있었다.


까만밤. 계속 어둡게만 느껴졌던 제주도, 이제는 조금씩 제주스러워지고 있다.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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