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제주에 (조금은 오래) 머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와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쏙쏙 생겨났다. (그중 진짜 걸음을 한 사람은 몇몇 뿐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빨리 움직이신 분들이 있었으니 -- 바로 나의 부모님이었다.
갑자기 생업을 놓고 제주에 덜렁 가 있다니까 괜찮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셨는지, 한달음에 비행기를 타고 오셨다.
우리 입장에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모시고 싶었다. 리조트를 고르고 또 고르며 예약하는데 어찌나 고심을 했는지 두세 번을 취소했다 다시 예약하길 반복했다. 우리 다섯 식구와 부모님이 함께 타고 다닐 차도 렌트하고, 하나하나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우리끼리는 마음 가는 대로, 발 닿는 대로 돌아다녔지만 부모님과는 ‘진짜 좋은 곳’으로 다니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기저기 많이도 검색했다. 장인장모님이 오신다니 특별히 남편이 단디(?) 준비했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어 아침 일찍 도착하는 비행기 표를 끊어드렸고, 남편은 직접 공항으로 두 분을 맞으러 갔다. 아이들은 집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맞이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것도 반가운데, 여긴 무려 제주도!!!!
함께 여행할 수 있어서, 그리고 며칠을 같이 있을 수가 있어 아이들은 잔뜩 들떴다.
함께한 며칠 동안 우리는 정말 부지런히 제주를 누볐다.
시작은 제주민속오일장이었다. 시장 특유의 정겨운 활기에 부모님도 아이들도 금세 웃음을 띠었다. 할아버지 찬스를 써서 이것저것 사 먹고 갖고 싶은 것도 슬쩍 손에 넣는 아이들의 모습이 재밌었다. 아기자기 시장투어를 마치고 가봤던 해수욕장 중 예뻤던 협재로 향했다. 바람이 무지막지하게 불어서 온전히 즐기지는 못했지만 제주에 오면 바다가 아닌가! 또!! 빠질 수 없는 오름, 금오름이 오르기 쉽다 해서 가볍게 올랐는데 생각보다 입이 떡 벌어지는 멋진 풍경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어서 놀랐다. 올라가면서는 날이 흐려 바람에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숨을 헐떡이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올라가니 구름이 걷히고 선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오름에서 내려와서는 아쉬움에 성이시돌목장으로 향했는데 역시나 추워서 금방 돌아보게 되었지만 이것도 다 추억이려니 행복회로를 돌렸다. 저녁은 아이들을 고려하여 올레시장에서 맛있는 거 위주로 사 와서 숙소에서 먹기로... 좋은 사람들과 좋은 것 보고 맛있는 것 먹고 하루가 꽉 찼다.
이튿날엔 휴애리를 찾았다. 제주에 오기 전까지 동백꽃이 이토록 아름답고 먹먹한 감동을 주는 꽃인지 알지 못했다. 온통 앙상한 겨울 가지들 속에 푸른 잎과 붉은 색채를 간직한 존재. 그것이 나에게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동백꽃이 한창 피어있는 길을 걸으며 눈으로만 보기가 아까워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었는지 역시 남는 것은 사진뿐인 것일까. 아이들도 공원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니 어른들도 아이들도 맞춤인 공간이었다. 우리의 두 번째 오름, 물영아리 오름. 멋있다고 소문난 곳은 잠시 폐쇄되어있어 가지 못했고 막내가 나의 품에서 잠들어서 남편과 엄마 두 남자 녀석들은 전망대로 향했고 아빠와 나 그리고 막내는 중간에 벤치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오랜만에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빠의 사랑과 걱정 따뜻한 마음을 받는 시간이었다. 중문에 엄청나게 싸고 신선한 횟집을 들러 회를 떴다. 그것을 받아 들고는 정말 놀랐다. 가성비라는 말은 이런 곳에 쓰라고 만들어진 걸 거다. 어쨌든 어른들은 회를 아이들은 피자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대망의 마지막날, 아쉬움을 안고 여미지 식물원을 찾았다. 그곳엔 엄청난 화가선생님이 있었다. 초상화를 그려주는데 한 사람당 15분이란다. 엄마아빠 두 분을 모델 자리에 앉혀드리고 지켜보는데 쓱쓱쓱 완성~ 이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퀄리티는 상당하여 우리 모두들 만족감을 감추지 못했다.
식물원을 둘러보던 중 비행기 결항 소식을 받았다. 날씨로 인한 결항은 아니었고 비행기 기체문제였다. 얼마 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있던 터라 철저하게 하느라 결항을 결정한 걸까 하며 문자를 보자마자 서둘러 다른 항공편을 예약했다.
“끝!! 다른 거 예약했어”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식물원 밖에 내리고 있는 눈을 발견했다. 눈이 조금씩 내리더니 순식간에 거센 눈보라로 바뀌었다. 눈은 쌓이기 시작했고 제주도는 온통 하얀 섬이 되었다.
“오늘은 비행기 못 뜰 것 같은데....”
우리는 다시 머물고 있던 집으로 돌아와 폭설로 인한 두 번째 결항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역시나 ‘결항’
텅 빈 공항에는 어떻게든 빠른 비행기를 타고 육지로 가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내일은 뜰까? 모레는 뜰까?
언제로 비행기를 예약해야 할지 상당한 고민이 되었다.
눈 덕분에 겨우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여유를 갖고 이틀 뒤 낮 시간 아시아나 항공편을 예약했다.
날짜가 미뤄진 덕에 묵혀있던 마일리지를 쓸 수 있었고 예약한 항공편이 뜻밖에 큰 비행기라 조금 더 마음이 놓였다.
자 이제 이틀이 늘어났으니
다시 렌트를 하고 집 근처 숙소를 잡고. 분주했다.
다음날 여정은 눈 덕분에 실내.
가보고 싶었던 아르떼 뮤지엄으로 향했다. 또 다른 세계.
어둠과 빛, 소리와 색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환상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말없이 감탄했다.
“여긴 정말, 제주답지 않은 제주 같다” 분명 자연 속이 아니었음에도 자연이 주는 광활함과 환상을 맛보았다.
마지막 여정은 두 분이 돌아가시는 날이라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고 비교적 조용한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아쉬워 잠시 바다에 들렀다가 공항행.
이른 오후 비행기라 점심을 먹고 헤어질 준비를 하였다.
2박 3일 찐하게 함께 있다가 두 분을 보내드리려니 뭉클한 것이 밀려 올라왔다.
쌓여가는 폭설을 보며 내심 ‘결항! 결항!’을 외쳤던 것 같다.
눈에게 고맙다.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뜻밖의 눈 덕분에 부모님과 이틀이나 더 함께할 수 있었다.
눈 때문에 함께한 시간이 더 길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웃으며 작별할 수 있었다.
그 섬, 그 겨울, 그리고 눈.
그날들을 우리는 마음에 고이 간직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기억은 우리를 종종 웃게 만들고, 때로는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