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모양을 한 풀들 중 어떤 풀은 길쭉하고 끝이 뾰족하고, 어떤 건 둥근 잎 모양을 하고 어떤 건 작고, 어떤 잎은 크고 모두가 제각각이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 달린 꽃들이 보인다.
꽃들의 모양도 다른데 색깔도 제 각각이다. 보라색, 흰색, 노란색, 빨간색 피우고 싶은데로 피워진 꽃들이 자유하며 사람의 눈을 혹은 마음에 예쁜 생각을 가져다준다.
"예쁘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게 된다. 들의 풀도 각자의 개성대로 피우고 싶은데로 피운 것 같지만, 각각의 꽃마다 본성을 가지고 피었을 것이다. 그런 꽃을 사람도 피운다. 그러나 지리멸열 하게도 나 스스로의 꽃을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내 자아는 고장 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에도 사람이 꽃처럼 보이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성경 속 하나님의 말씀은 들의 백합화 보다 더 귀한 존재로 만들었고 하늘이 보호하고 귀이 여긴다고 했으니
인간은 꽃보다 귀하다고 했다. 그런 사람꽃을 내 마음대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생각이 들어진다.
또한 나 자신에게 칭찬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겸손이 아니었음을 아이를 통해 배운다.
꽃들은 색이 바래었을 뿐 꽃이 지고 나면 다시 피운다.
많은 칭찬과 기다림 끝에 꽃 말이다.
키가 185가 넘는 큰아들이 몇 달 만에 나의 등뒤로 와서 살며시 백허그를 해주었다. 23살 아들이다.
살이 많이 빠졌지만 나보다 훨씬 큰 아들에게 안기는 기분은 안겨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냥 행복하다.
몇 달 동안 엄마를 멀리하며 게임만 하더니 무슨 일인지 컴퓨터 화면을 무릎담요로 덮어 놓았다.
"게임을 그만하려는 건 아니야"라고 말했다.
12월 군 제대를 하고 밤을 새워가며 게임만 하던 녀석이었다. "난 게임만 할 거야"를 선언한 녀석이다. 황당하고 어이없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후 그저 지나가다 한 번씩 "이 자식아 그만 좀 해라!"라고 말하다가 어느 날 부턴가는 "밥이나 먹고 해라"로 변하던 내 말은 "네가 언제까지 하나 보자!"라는 혼잣말로 참아내길몇 달이다.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지 몰라 그러니 너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게임을 그만하는 게 어떨까?"라며 대면 대면 말해 두었다.
내 생각이 꼭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지만,
게임을 해서 돈을 수억 번다는 것도 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화면 안에서 어떤 무엇으로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어쩌면 너무나 구세대 의식 뿌리가 내려서일까?
오래전부터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아들의 생각을 한때는 심하게 말렸던 적이 있다가 아들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그렇다면 그래 열심히 해봐라 라며 게임용 컴퓨터를 사줬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때의 일이다. 어느 날 병아리 부화기를 만들겠다며 네이버에서 찾아가며 만들기 위한 재료를 구입해야 한다고 했었다. 본인은 닭을 키우며 살고 싶다며 한동안 온통 몰입하고 재료들을 연구하고 메모해 가며 재료를 구입하러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짜증을 내며 함께 했던 기억이 났다. 다 준비해 주면서도 왜 기분 좋게 해주지 못하고, 내 생각에만 몰두 한 나머지 아파트에서 병아리가 태어난다면, 그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설명을 해가며 어떻게 키우냐는 말로 아들의 생각과 행동을 말렸던 적이 있었다.
결국은 7번을 넘게 부화를 시켰고, 아파트에서 닭을 키워내는 일을 해야만 했었다. 나로서는 정말 힘들었다. 꼬꼬댁 소리도 힘들었으며 내 손은 언제나 휴지를 들고 다니며 닭똥을 치우는 일 또한 힘들고 싫었다.(물론 닭장 청소와 닭 똥을 치우는 일은 아들의 몫이라고 못 박아 두었지만 그 왜에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닭을 안고 동물병원에도 가야 했다. 웃픈 일들이 기억을 스쳐간다. 모두 개나, 고양이를 데려와 대기석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 아이만 닭을 안고 걱정 가득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웃음이 나기도 했다.
동심을 깨지 않으신 의사 선생님께 참 감사했던 기억이
그렇게 닭을 사랑했던 아이는 게임을 사랑하는 아이가 되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이번에는 오래갔다.
밤을 새워하더니 급기야는 탈모가 생겨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참아내느라 힘들었지만, 기다려야 했다. 원 없이 하고 싶은 만큼 후회 없을 만큼 해버리라고 뒀다.
그리곤 너의 인생은 네가 책임지며 사는 거라고 겁박도 주었다. 그리곤 그 뒤에 한 마디씩 칭찬의 거리를 찾아 해 줬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칭찬 "우리 아들 밥 다 먹었네 잘했네"같은 싸구려 칭찬들 말이다. 무려 군 입대 전까지.
시시콜콜 시답잖은 칭찬들을 할 때마다 미동도 없어 보였지만, 다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도 꽤 높은 성적을 내는 아들이었지만 앉아만 있는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였다.
나는 새벽예배를 다니며 기도 했다. "주님 이쯤 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들과 소통하는 것보다 대답 없는 주님과의 소통이 더 나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혹시 광야입니까?"라고말하며 아니 따지며 기도 했었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그럼 광야인 줄 아직도 몰랐어?"라는 것만 같았다.
자식을 키운다는 건 끝도 없을 것 같은 기다림과 광야의 목마름 같았고, 뜨거운 광야 속의 외로운 내 모습이 애처로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난 '광야'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