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모두 영어로 이루어졌다. 이메일과 문서 작성, 동료들과의 대화 모두 영어였다. 같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만은 예외였다. 러시아 사람들끼리는 러시아어를 썼다. 나도 한국 업체와는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었지만 독일어가 들리지 않았다. 가끔 독일 직원들끼리 얘기할 때 빼고는 온통 영어였다. 나의 첫 미팅도 물론 영어였다. 여러 문화권의 악센트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다양한 영어가 날아다녔다. 미국 영어에 익숙한 나는 프랑스 영어, 스페인 영어, 영국 영어, 독일 영어, 일본 영어, 러시아 영어, 인도 영어, 중국 영어, 아일랜드 영어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앞에서 슬쩍 언급했지만, 나는 어린 시절의 일부를 독일에서 보냈다. 아버지의 일 때문에 가족 모두 독일로 이사해 약 4년간 프랑크푸르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독일이 유로가 아닌 도이치 마르크를 쓰던 시절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부모님은 독일어보다 영어가 더 쓸모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고, 형과 나를 독일 초등학교가 아닌 국제학교에 보내셨다. 국제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가르친다. 고급 영어는 커서 공부한 것이지만, 내 영어의 근본은 어린 시절에 만들어졌다. 그때 국제학교에 보내주신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베를린에서 영어는 중요하다. 그 중요함은 계속 커지고 있다. 보수적인 다른 독일 도시와 다르게, 베를린은 점점 독일의 뉴욕이 되어가고 있다. 공무원에게 서류를 제출할 때를 제외하면 영어만 쓰고 살아도 대체로 크게 불편하지 않다. 식당이나 카페를 가면 독일어를 잘 못하는 직원들도 종종 보인다. 영어로만 쓰인 광고판도 자주 보인다. 독일의 어느 도시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곳. 빈부격차가 늘면서 갈등도 생기고 있지만, 자유와 예술과 역사가 있어 매력적인 곳. 다양한 인종과 문화, 라이프 스타일, 가치관이 뒤섞이며 만들어지는 혼돈의 도시. 그리고 그 혼돈 속에 영어가 있다.
나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낯선 사람과도 영어를 통해 이어질 수 있다. 영어로 이야기하며 우리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고,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을 나눌 수 있다.
한국의 채용 공고에는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고 굳이 쓰여 있지 않다. 하지만 베를린 스타트업의 채용 공고를 보면 어떤 언어를 잘해야 하는지 쓰여 있다. 영어만 잘하면 되는지, 말하기와 쓰기 둘 다 잘해야 하는지, 중국어를 할 줄 알면 플러스인지, 독일어를 못해도 상관없는지 대체로 확인할 수 있다. 독일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스타트업 일자리가 많다. 그만큼 국가 장벽을 신경쓰지 않는 비즈니스가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부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원한다. 개발자의 경우 워낙 귀하신 몸이라 영어를 좀 못해도 포용해 주지만, 영어를 잘하는 개발자라면 훨씬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 누구와 일을 하든, 이 업계에서 영어는 정말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