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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원 Dec 02. 2024

6. 퇴근의 맛

6. 퇴근의 맛 


지나가는 교육행정직을 붙잡고 이 직렬 최고의 장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이른 퇴근’을 꼽을 것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관심 있거나 혹은 행정직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교육행정직의 ‘워라밸 최고 직렬’, ‘아이 키우면서 하기 좋은 공무원 직렬’ 등 구미가 당기는 수식어를 한 번쯤 접해보았을 것이다. 희소식은 그 수식어구가 미끼 상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소속이 교육청이나 지원청 같은 상위 기관이 아니라는 전제하에만. 

상위 기관은 타 직렬과 마찬가지로 9 to 6의 근무 시간을 준용한다. 점심시간 1시간을 포함하여 총 9시간 동안 회사에 있는 셈이다. 다만 하위 기관인 학교는 점심시간이 따로 없다. 교사들은 식사 시간에도 아이들을 지도해야 하고, 교무실이나 행정실의 경우에는 민원 응대를 하거나 주요 서류 및 직인을 두고 실을 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행정실의 경우 교대로 식사하러 가는데, 늦으면 30분 보통은 20분 내로 식사를 마친다.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업무가 몰아치거나, 종일 앉아 있어서 배가 더부룩한 날에는 온전한 점심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지만, 일찍 퇴근할 수만 있다면 점심시간이야 없어도 그만이긴 하다.      



전 직업인 승무원은 근무 시간의 변동이 큰 직업이라, 퇴근이라는 개념이 희미했다. 장거리 비행의 경우 1박 2일이나 2박 3일이 한 근무일로 묶이기 때문에, 그날의 비행이 끝났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타 항공사에 비해 승무원의 비행시간이 적은 곳이긴 했지만, 이 업계에선 비행기가 지상에 있을수록 손해인지라, 비행 일정이 촘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거듭 말하지만, 체력이 한 줌인 내 경우엔 퇴근하면 다음 비행을 위해 혹은 살기 위해 먹거나 자는 게 전부였다. 

일과가 규칙적인 공무원으로 환승 이직을 하고 나서도, 얼마간은 퇴근 이후의 삶이 없다시피 했다. 달과 별을 보며 퇴근하는 날이 많았을 때는 이게 무슨 워라밸 최고의 직업이냐며 원망도 많이 했고, 역시 인터넷의 후기는 믿을 게 못 된다며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고 난 뒤로는, 회식하는 날을 제외하고 어두울 때 퇴근한 적은 없었다. 낮이 긴 하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밤이 길어지는 동지에도 마찬가지다. 워낙 근무지와 집이 멀어서 가는 동안 깜깜해지기는 해도, 학교 정문을 빠져나오는 시간에 해가 떨어진 적은 없었다. 




학교마다 출퇴근 시간은 조금씩 다른데, 지금 있는 곳은 8시 40분까지 출근해서, 16시 40에 퇴근한다. 아직 다른 학교를 가본 적 없는 신규인지라 잘은 모르지만, 듣기로는 아무리 늦어도 17시에는 퇴근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은혜로운 퇴근 시간이란 말인가. 밥 먹고, 씻고, 내일 출근 준비를 하고…. 차를 구매한 뒤로는 평상시에 하던 루틴을 그대로 해도 시간이 남을뿐더러, 체력도 남아돌았다. 직장을 다닌 뒤로 내 시간이 이렇게까지 흘러넘친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남는 시간 동안 집에 있는 식물을 돌봤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물만 간신히 주던 애들의 화분을 갈아주기도 하고, 오래된 잎들을 다듬기도 했다. 한두 번 새로운 식물을 보러 근처에 있는 화훼단지에 가보다가, 점점 활동 반경을 넓혀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가기도 하고, 장을 봐와서 요리해 먹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멀리했던 책을 읽기도 하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어학 공부도 하다가, 고질적인 어깨 통증에 운동을 시작했다. 



2, 3년마다 순환근무를 하는 교육행정직 특성상, 나도 곧 있으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가고 싶은 지역과 근무처를 선택할 수 있는데(물론 선택한다고 다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초창기에는 빠른 승진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다음 근무지는 무조건 상위 기관으로 가려고 했다. 그때는 퇴근이 늦다거나, 매일 초과근무의 연속이더라도 상관없었다. 물 경력으로 채워진 시간의 간극을 빨리 메꾸고 싶었고,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급여를 하루라도 먼저 받고 싶었다. 그러나 2년간의 학교 근무는 많은 걸 바꿔놓았다. 이미 퇴근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제는 초과근무의 ㅊ자만 들어도 학을 떼고, 6시 퇴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지난번에는 도 교육청 직속 기관으로 발령받으신 전 실장님을 뵈러 갔었다. 교행(교육행정직)이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던 신규는 어디로 가고, 고새 안티가 되어 학교 근무의 고충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던 중에, 실장님이 그러셨다. 


“주무관님, 그러면 여기로 와요~”     


아,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업무가 힘듦과 고됨의 연속이라도, 학교에서의 근무를 놓칠 수는 없었다.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으나, 원래 기관 근무도 생각하지 않았느냐며 거듭 권유하셨다. 학교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 사항이 덜하다는 조언과 함께. 살짝 솔깃하긴 했지만, 4시 40분 퇴근을 포기할 순 없었다. 부드러운 회유를 필사적으로 거절하며 말했다. 


“실장님, 저는 학교에 뼈를 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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