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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식 갈등 해결법

없어도 될 피해는 만들지 않는

by 장동혁 Feb 14. 2025

  법원서 사건을 조정하다 보면 종종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만난다.


  전세보증금 다툼에서 세입자가 받고 나갈 보증금은 합의가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는 관리비를 놓고 옥신각신 하다 합의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공 들여 만든 조정안이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이다. 아무리 좋은 안이라도 당사자가 거부하면 소용없다. 재판으로 가서 벌어질 비극을 생각할 때 제삼자로선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공정성을 감지하는 촉수는 갈수록 예민해지는데 억울함을 담아둘 그릇은 점정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둘 이상이 모이면 생기는 게 갈등이다. 그리고 갈등의 주로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며 시작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억울해하며 공정성을 부르짖는다. 그러다 안되면 찾는 곳이 법원이다.


  그런데 법적 해결 방식이 문제를 해결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과연 최선의 방법일까?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과 그의 부인 허옥란이 보여준 갈등 해결법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황당하기까지 한 그들의 해결법은, 법에만 의존하다 스스로 문제 해결 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공정성을 맞춘다는 것


“오늘부터 나 집안일 안 해! 당신하고 하소용도 한 번, 나하고 임분방도 한 번이었어. 그런데 당신 하고 하소용 사이에서는 일락이가 태어났지만, 나하고 임분방 사이에서는 사락이가 안 나왔잖아. 그러니까 당신 잘못이 더 크다고!”
-허삼관 매혈기 중


  허삼관의 주장은 억지 같지만 우리 감정이 움직이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우리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 돌려줘야 직성이 풀린다.


  이러한 인간의 성마른 본성은 인류 최초 법전에도 반영돼 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 규범은 결과의 공정성을 추구하는 걸 넘어 다른 동물들에서는 보기 힘든 잔혹한 복수를 꿈꾸는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일락이가 자신의 연적 하소용의 씨앗으로 밝혀지자 허삼관은 온갖 위세를 다 부린다. 장남을 홀대하는가 하면 부인을 괄시하며 억울함을 푼다. 하나 그런다고 풀릴 분이 아니다.


  그렇게 늘 무언가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해오던 허삼관에게 한 때 흠모했던 임분방이 다리를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한걸음에 달려간다. 말로는 작업반장의 도리 운운했지만, 결국 과거의 감정이 되살아났고 허삼관은 병상에 누운 임분방을 덮친다.


  이 자라대가리는 옛 연인에게 선물을 안기겠다며 또 피를 뽑았고, 과한 선물 때문에 사건이 들통나고 만다. "아이야!" 하는 허옥란 특유의 괴성이 온 동네에 퍼졌고, 부부는 크게 한바탕 한다.


  하지만 결론은 의외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불장난이 오히려 부부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피까지 팔아 남의 여자에게 선물한 허삼관의 만행에 분노한 그녀는 남은 돈을 압수해 자신과 자식들 겨울날 옷을 해 입으며 분을 푼다. 그러자 허삼관은 “내 피 판돈인데, 왜 내 것은 없냐!”는 매 맞을 소리를 한다. 결국 그녀는 쌈짓돈까지 보태 남편의 겨울옷을 마련해 주며 사건을 일단락 짓는다.


  속이야 상하겠지만 허옥란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치졸한 남편에게 평생 기죽어 살았을 테니까. 오늘날처럼 세상이 복잡하지도 각박하지도 않던 시절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허삼관 부부의 피해 계산법


  허삼관의 주장처럼 사락이가 안 생겼으니 결과적으로는 허삼관이 손해를 본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공정성을 판단할 때 단순히 결과의 공정성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의도'의 공정까지 고려한다. 한창나이에 실수로 일락이를 만든 것과, 일부러 부정행위를 한 행위가 같을 수 없다.

 

  결국 사락이를 만들지 못한 허삼관은 결과의 공정성 면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가정까지 있는 남자가 옛 여인을 쫓아가 거사를 치른 것은 그 과정과 의도가 불손하다.


  끝까지 꼬투리를 잡아가며 기싸움을 벌이기보다는 한 번씩 주고받은 셈 치고 큰 틀에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허삼관 가족의 삶은 새롭게 시작한다. 물론 세상 물정 어둡던 시절이니 가능하지,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마 당장 법정으로 달려가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다. 하지만, 가장 합리적이고 세련된 문제 해결 방식이라고 하는 재판이 반드시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줄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았다.


법정으로 가면 정말 공정할까?


 사람들은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법적 보상과 인정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법정에서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적 정의’ 일뿐이다. 따라서 판결이 나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속시원히 풀리는 것은 아니다. 법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법전에는 꼬인 인간의 감정을 풀어 줄 묘안이 나와 있지 않다.

 

  또한 법원은 절차적 공정성을 보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일단 법적 다툼에 들어가면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급격히 줄어든다. 절차와 전문가 틈에서 자율성은 사라지고 제삼자의 판단만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


  뿐만 아니라 굳이 보지 않아도 될 치부를 보게 되고, 없어도 될 피해가 더해지는 꼴이 된다. 그러다 보니 법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다소 엉뚱하긴 하지만 허삼관 부부가 선택한 전통 요법이 더 지혜로운 방법인지도 모른다. 서로 한 대씩 때리고 악수하며 끝내는 방법 말이다.


  그것이 오늘날 법정에서 진행되는 조정의 원리다. 문제를 큰 틀에서 해결해 피해가 더 커지는 것을 함께 막는 것. 조정은 덜 잃기 위한 것이지 더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지엽적인 것에 목메지 않는 거다.


공정성을 포기해야만 해결되는 갈등도 있다


  허삼관은 평생 가족을 위해 피를 팔았다. 세월이 흘러 고난의 시대가 가고 먹고 살만 해지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로 한다. 배고프던 시절, 피를 뽑은 뒤 몸을 보하려 먹었던 돼지 간볶음과 따뜻한 황주 두 냥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나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핀잔만 듣고 쫓겨난다. 어쩌다 보니 그는 더 이상 피조차 팔 수 없는 신세가 돼버린 것이다. 젊을 때는 피를 팔아 가족을 먹여 살렸는데, 나이가 드니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제야 허삼관은 깨닫는다. 결국 인생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공정한 대가를 바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아니, 어쩌면 공정성이 손에 쥐어져도 그것을 볼 눈이 없는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허탈한 마음에 주책없이 눈물까지 흘리며 돌아온 가장을 가족들은 따뜻하게 품어준다. 결국 가족을 위해 희생해 가며 손해를 봐왔던 그는 공정성보다 더 숭고한 가치인 사랑으로 보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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