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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재개발 거리에서 파리의 회색 지붕까지

도시는 어떻게 기억을 남기는가 - 파괴와 보존이 만든 유산

by Jasmine


나는 어릴 적부터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살아왔다. 그때마다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도시의 풍경이었다. 유럽의 도시는 수백 년 된 건물이 오늘의 삶과 함께 숨 쉬고 있었지만, 한국의 도시는 달랐다. 신도시에 살았던 나는 그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해외에 나갔다 돌아오면 익숙했던 거리가 사라지고, 낯선 동네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상의 공간은 물론이고, 오래된 건물이나 문화유산마저 개발의 이름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모습은 늘 안타까웠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 마음속에는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왜 어떤 도시는 지켜지고, 어떤 도시는 지워지는가.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재개발은 항상 지워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반면 파리는 19세기 오스만 남작이 주도한 도시 대개조를 통해, 한때 파괴의 상징이던 거리와 건물들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지켜야 할 유산’이 되었다. 이 역설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에서 건축 유산 보존을 공부하게 되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 <집구석들(Pot-Bouille)>은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배경은 파리의 슈아죌 거리, 오스만 양식의 아파트. 파리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어도 눈 감고도 지도에서 짚어낼 수 있을 그 거리. 졸라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오래전 발길을 옮겼던 그 거리의 공기와 소음이 다시 살아났다.


이 거리의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19세기 파리 도시 개조의 산물이었다. 오스만 남작이 주도한 대개조 사업은 좁고 어두운 중세 골목들을 허물고, 넓은 직선 도로와 통일된 석조 건물로 도시를 재편했다. 권력이 질서와 위생, 감시를 목적으로 밀어붙인 이 ‘지움과 세움’의 과정은 당시에도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물이 된 건물들과 회색 지붕은 15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파리를 대표하는 유산이 되었다.




나는 그 유산을 직접 체감한 적이 있다. 파리에 살던 시절, 친구의 ‘하녀 방’에 잠시 머물렀다. 건물 꼭대기에 붙어 있는 작은 다락방으로, 복도의 화장실을 함께 써야 했다. 졸라가 묘사한 19세기의 하녀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그 공간은 파리 건축이 품은 기억의 두께를 실감하게 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건물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파리의 하늘선을 이루는 회색 지붕 역시 오스만 시대부터 이어져 온 모습이다. 균일한 석조 건물 위에 얹힌 아연 지붕은 도시 전체를 회색빛으로 물들이며, 파리를 '회색 도시'로 각인시켰다. 이 지붕을 얹는 전통 기술이 최근 인류무형문화유산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건축 자재를 넘어, 도시의 정체성과 미관을 지켜내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파리 16구의 오스만 양식 아파트. 오늘날 파리 풍경을 상징하는 건축이다.



이런 풍경을 가능하게 한 주체는 건축가들이었다. 졸라의 소설 속에서도 눈길을 끈 인물도 바로 건축가 깡빠르동이다. 그는 국립미술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성당 보수 공사를 맡게 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건축이 아직 미술의 한 전공이었다. 지금은 건축가가 되려면 국립건축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 l’Architecture)에 진학해야 하지만, 1968년까지는 회화·조각·판화와 함께 파리 국립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안에서 건축을 가르쳤다. 이후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건축 교육을 별도로 분리해 8개의 건축 교육 단위를 만들었고, 그것이 지금의 국립건축학교로 발전했다.


이 과정은 프랑스가 건축을 공학이 아니라 예술의 일부로 보아온 전통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건축학과가 공대에 속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건축사를 인문학적 맥락 속에서, 예술사학과의 한 전공으로 공부할 수 있다. 나 역시 그 전통에 이끌려 건축 유산 보존의 역사를 배우기 위해 예술사학과에 들어갔다.


그런 맥락에서 졸라의 소설 속 깡빠르동의 모습은 내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는 성당 보수를 맡으며, 제단과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상에 빛이 닿을 때 어떤 극적 효과가 나타날지를 흥분 속에 설명한다. 햇빛이 조각상을 비출 때 생기는 초자연적인 생명감, 스테인드글라스와 금촛대가 조성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예배자들이 마주할 감동을 그는 미리 그려내며 설계했다. 졸라는 이를 통해 단순히 한 건축가의 열정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성당 복원이 어떤 미학적 기준 속에서 이루어졌는지, 또 건축가가 사회적 신분과 명성을 확보하는 방식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했다. 픽션이지만, 건축 유산 보존의 실제 현장을 증언하는 문학적 사료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의 도시들은 여전히 개발의 속도에 맞춰 얼굴을 바꾸어간다. 근대 건축조차 오래 버티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파리는 19세기 소설 속에 이미 보존과 복원의 감각을 새겨 넣었다. <집구석들>의 슈아죌 거리와 성당 보수 장면은, 도시가 어떻게 기억을 지키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증거다.


도시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담는 그릇이며, 세대를 이어주는 기억의 무대다. 문학이 남긴 기록은 건축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결국 “도시의 기억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한국에도 유효하다. 나는 오늘도 사라져 가는 흔적들을 좇으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도시의 기억을 품어야 할지를 묻는다.



파리의 회색 지붕. 뜻밖에 지붕 위를 걷는 사람을 보고 놀라 찍은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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