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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Jun 15. 2020

65살에 붓을 잡으면 인생이 달라질까?

어느 실용주의자의 고백

다들 엄마를 떠올리면 '넉넉함', '따뜻함', '인지함'이 연상된다는데, 우리 엄마는 어째 '실용적'이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엄마에게는 말 그대로 목적이 없는 행위란 존재하지 않았다.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청소를 했고,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서  요리를 했고, 아등바등 월급봉투에 의지하는 신세를 면해 보려 투자를 공부했다. 친구 엄마들이 에어로빅, 꽃꽂이, 서예, 지점토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며 친구도 만들고 재미있게 지내는 데 비해, 우리 엄마는 생전 그런 데 가는 법이 없었다. 음악도, 영화도, 운동도, 음식도 뭘 딱히 좋아하는 게 없었다. "엄마는 좋아하는 게 없어?"라고  물으면 "좋고 싫은 게 어딨어 (혹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라 대답했다.


그러던 엄마가 만 예순다섯이 되던 재작년 동네 문화센터의 기초 회화반에 등록을 했다고 전화 너머 알렸다. "오, 웬일이야?"라고 웃었다. 평생을 취미 한번 없이 지냈던 엄마라, 오래 못 가겠거니 했다. 그런데 늦바람이 무섭다던가. 엄마는 다음 학기, 그다음 학기도 등록했다. 특히 유화를 좋아했다. "수채화는 붓질 한번 잘못하면 곤란한데, 유화는 실수를 만회할 수 있어서 좋아."라며. 심지어 문화센터에 다니기 위해 (?) 개인 아뜰리에에서 과외도 받았다. "너 동네 문화센터라고 우습게 볼 게 아냐. 아줌마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아니? 우리 유화반 다니는 엄마들 거의 대부분 개인 교습받아." 한국인들의 열정에 난 다시 한번 두 손을 들었다. 매 학기 거의 같은 사람들이 같은 클래스에 등록한다고 했다. 그 안에서도 붓을 잡은 햇수와 어느 선생님 아래서 수학(?)했는지에 따라 은근히 급수가 갈리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다른 모든 약속은 미뤘지만, 유화 교실과 아뜰리에 과외 시간만은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어느 날 문화센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엄마가 평소보다 유난히 신났다. 그림 경력이 오래되어 베테랑으로 인정받는 다른 학생분이 "선생님, 제 그림 대회에 출품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이 정도 갖고는 어려워요."라던 선생님이 갑자기 바로 옆 엄마의 그림을 가리키며 "이분 그림 좋네요."라고 했단다. 베테랑 친구가 무안했을 것 같아 속으로 미안했다고는 하는데, 귀에 걸린 엄마의 입은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선생님이 내 그림에는 독특한 붓터치가 있고 색감이 좋다고 하시는 거 있지." 소녀처럼 얼굴이 상기된 엄마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엄마, 그렇게 좋아?" "좋지, 나도 뭐 하나쯤은 잘하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신감이 생겨."


순간 그 말에 목이 콱 막혔다. 엄마는 무엇이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오랜 시간 반대로 생각해 온 걸까. 은퇴 전까지 아빠는 오로지 회사 일에만 매달렸고 엄마는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졌다. 하루 종일 쓸고 닦아 소파 밑, 커튼 뒤에도 먼지가 보이는 법이 없었다. 오래된 싱어 재봉틀과 남대문에서 사 온 옷감으로 집안의 커튼을 뚝딱 만들고, 식구들 핀잔을 들으면서도 철마다 혼자 무거운 가구 배치를 바꿨다. 끼니마다 한식부터 베이킹까지 두루두루 영양가 있는 음식을 차렸기에 난 캔참치라는 걸 대학 가서야 처음 먹어봤다. 직접 나선 투자에서는 타고난 간이 작아 '강남 큰손'이 되진 못했어도 손실없이 제법 수익을 냈다 (투자해 본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엄마보다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마흔이 되어 가는 지금도 엄마가 오시면 혼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집안 어디를 닦아야 최대한 덜 더러워 보일까. 라면과 참치는 엄마 도착 전에 먹어 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 애들 버릇은 왜 이리 잘못 들였을까. 왜 내 주식계좌는 또 마이너스가 난 걸까 머리를 뜯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내가 좋아서' 뭔가를 한다는 건 언감생심 꿈조차 꿀 수 없는 환경이었다. 철이 들기 전에 망한 친정집에서 귀한 외아들 아래 천덕꾸러기 막내로 차별받으며 컸으니 바지런히 집안일이라도 거들어야 했다. 빨리 취직해서 집안 살림을 돕지 않고 기어코 고집을 부려 (형부의 도움으로) 다닌 대학내내 친정엄마 등쌀에 내 몫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새겨졌을 터다. 결혼 후에도, 엄마는 엄마와 아내라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엄마 역할을 성실히 해 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엄마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건 하나도 없이. 회사에서 승진을 거듭하는 아빠와 점점 둥지를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엄마는 홀로 출발선에 서성이며 소모만 되는 존재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붓은 엄마의 자신감을 회복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어느 날 엄마는 "공부 잘해봐야, 돈 많이 벌어봐야 뭐하니. 그저 건강하고, 가족이랑 사랑하고, 행복한 게 최고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멍하니 한참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은 우리 엄마 캐릭터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원래 '베니스의 상인'의 환생이라고 불릴 만큼 짠순이었던 우리 엄마였는데. 그날 밤 나와 남동생은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카톡을 주고받으며 혹시 엄마가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가 걱정했다.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한다 하소연하면, "공부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줄 필요 없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게 중요하다",라고 라고 거듭 강조한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첫 시험에서 10개를 틀렸다가 그날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산 증인인 내가 있는데. 어쨌든 엄마의 마음은 넓어지고 넉넉해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고 인내하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어떠한 목적도 없이 기대도 없이 스스로를 위해 붓을 잡은 지 2년 만에 일어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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