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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Jun 05. 2020

고등어조림이 붙여준 꼬리

사랑한단 말 대신 고등어조림을 주문하세요

저녁 시간이 되어 놀이터에서 헐레벌떡 들어오는데 모래가 찬 신발을 현관에 벗어던지기가 무섭게 생선 비린내가 코에 훅 끼쳤다.

“오늘도 고등어야? 난 생선 싫어!”

“고등어 먹으면 머리 좋아져. 네가 좋아하는 조림 했어, 어서 씻고 와서 먹자.”

엄마는 맨날 똑같은 소리야, 투덜대며 앉은뱅이 밥상 앞에 앉았다. 숭덩숭덩 자른 무 위에 토막낸 고등어를 얹고 자박하게 끓인 고등어조림이 상 한가운데 놓였다. 엄마는 내 볼멘소리는 못 들은 척, 연신 '머리 좋아진다'며 고등어의 푸른 껍질과 그 아래 갈색 부분을 떼어 내 수저에 올려주느라 바빴다. 국민학생이면 어련히 젓가락질 혼자 할 법도 한데, 행여 잔가시가 목에 걸릴까 정성으로 일일이 발라주는 엄마 모습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밥 한 그릇 뚝딱 비웠다.


애증의 고등어


회사에 침낭을 가져가서까지 일에 매진했던 아빠와 저녁식사를 함께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일해도 개나리를 닮은 노란색 월급봉투는 얇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태어나서 1년간 열한 번이나 이사를 다니고, 심지어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도 했던 가난한 살림에 고기는 특별한 날 아니면 구경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없이 '생선 싫어, 고기 좋아'를 외치는 딸에게 엄마는 부단히도 자주 고등어를 먹였다. 그 시절, 엄마가 찾을 수 있는 가장 부담없는 양질의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것이다. 대신 정성을 담뿍 쏟았다. 엄마의 고등어조림은 고춧가루를 많이 쓰는 얼큰한 매운맛 대신, 아이도 먹을 수 있게 달큰 짭조름한 간장 양념을 썼다. 시원한 아욱국도, 하얀 소고기 뭇국도, 아삭한 콩나물무침이나, 들깨가루가 솔솔 뿌려진 감자채 볶음 같은 밑반찬도 매번 새로 만들었지, 여러 날 두고 먹이지 않았다.

이미지일 뿐, 이렇게까지 화려한 밥상은 아니었다

엄마 말대로 머리가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집에서 생선을 굽는다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는 아이 둘에게 생선을 바지런히 발라 주려면 제대로 된 내 식사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조상님들은 대체 왜 손은 손대로 가지만 그만으로는 초라한 밑반찬이란 걸 만들어 내 인생을 힘들게 하는 걸까 한탄도 했다. 제대로 된 배달 음식도, 반찬가게도 없는 미국에서 워킹맘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왜 난 우리 엄마가 해 준 것처럼 끼니마다 새 국과 반찬을 대령하진 못하나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리고 비로소 옛날 앉은뱅이 밥상 앞에 함께 앉았던 내 엄마가 살풋 보였다 - 세월을 거슬러서 이제서야. 그때 우리 엄마는 뭘 먹었을까. 고소한 껍질과 큼직한 살덩이는 죄다 다 내 수저 위에 올라왔는데.


작년 겨울, 2층에 남편과 아이들이 아무 데나 놔둔 그릇과 컵들을 잔뜩 수거해서 내려오다 집 계단에서 발이 미끄러졌다. 공중으로 날았다 떨어지면서 허리를 계단에 부딪혔다. 정신이 아득했던 몇 분이 지나고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한 응급실에서 꼬리뼈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깁스를 할 수도 없고 수술도 효과 없는 부위라 제대로 뼈가 붙는데 6-12주가 걸릴 거라던 미국 의사는 당분간 많이 아플 거라며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코돈을 처방했다.


꼬리뼈 골절은 참 고약한 부상이었다. 정신도 팔다리도 멀쩡한데, 허리를 굽히거나 제대로 앉을 수가 없으니 땅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도 주울 수 없었고 부엌에서 밥을 하기도 힘들었다. 장바구니를 들기는커녕, 슈퍼까지 운전해 나갈 수도 없었다. 남편 혼자 모든 걸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걸, 일주일이 지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미국 오시는 걸 좋아하진 않으신다는 걸 알기에 고민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어 혹시 오셔서 도와주실 수 있겠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의외로 엄마 아빠는 흔쾌히 동의하셨고 단 사흘 만에 당도하셨다. 그리고 한 달간 잔소리 한번 없이 오직 정성만을 퍼 주셨다. 그동안 가르친다고, 버릇된다고, 자기 스스로 해 봐야 된다고 보여주지 않았던 엄마의 마음 100%를 돌고 돌아 불혹 앞에서 빼꼼 보게 되었다.


마흔이 되어가는 딸이 그 부담을 전가한 대상이 결국 칠순이 되어가시는 부모님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고 너무 감사하고 동시에 미안했다. 부모님을 살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다시 아기처럼 보살핌을 받고 있다니. 우리 가족은 무뚝뚝해서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데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라 어떻게 내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말이란 왠지... 목구멍 밖으로 내놓아 허공에 흩어지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엄마, 이 구두 10년 넘게 신었네, 새 거 사는 게 어때? 아빠, 겨울 재킷 새 거 필요하지 않을까? 물으면 필요 없다, 너희 돈 모으라는 핀잔만 들었다.


하루는 엄마가 먹고 싶은 게 없는지 물었다.

"나 고등어조림."

"에이 왜, 더 좋은 음식도 많은데. 너 생선 안 좋아하잖아."

"그래도 엄마가 많이 해줬던 거잖아, 고등어조림."

"그때는 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지금은 나아졌는데 좋은 거 먹어. 애들 먹이는 데 아끼지 말고."


엄마 마음 한 켠에는 딸의 어린 시절 그 좋아하는 고기를 맘껏 먹이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난 엄마 고등어조림이 삼원가든 꽃등심보다 좋은데? 라고 말하진 못했지만 그날은 고집을 부려 고등어조림을 얻어먹었다. 한국에서 이고 지고 오신 시래기를 담뿍 넣어서. 그리고 괜히 밤에 몰래 울었다. 효도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들었는데, 기다려만 준다면 집이라도 사 드릴 것 마냥 시간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어서.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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