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쌤 Apr 20. 2020

냉동난자 vs. 젊은 엄마  

난자? 얼리면 되지!

큰 아이가 미국에서 유치원에 입학하던 날 내심 놀랐다. 미국의 공립 교육은 만 5세, 킨더가든(kindergarten)부터 시작하기에 부모들이 이 날을 아이가 세상으로 내딛는 첫 발걸음이라 본다. 이 전까지는 의외로 많은 미국 부모들이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다.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경제적 이유가 크다. 괜찮은 어린이집이 미취학 아동의 경우 월 $1000을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금액은 정말 보수적으로 잡은 수치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친한 선배는 월 $2500을 내기도 했다. 어이없는 가격 같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의 비싼 영어유치원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무상보육이 당연한 권리라 전업주부들도 최소 하루 몇 시간쯤은 자기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한국의 이야기는 미국 엄마들에게는 정말 별 세상의 이야기다.


어쨌든 내게도 그날이 왔다. 재택이지만 일을 한다는 이유로 종종 미국인 내니(nanny)가 오던 터라 육아부담이 다른 엄마들에 비해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줍음 많은 아이가 드디어 조직생활을 시작한다는 데 대해 내심 긴장도, 기대도 되었다. 그런데 입학식 날 풍경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자기 몸보다 큰 책가방을 메고 더러는 씩씩하게, 더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교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짓는 분들의 대략 절반이, 대체 엄마들인지 할머니들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백인들이 동년배 아시안에 비해 피부가 얇아서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감안해도, 대체로 45와 55세 사이 어디쯤으로 보이는 여성분들이었다. 다섯 살 아이를 둔 엄마들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좀 많이.


나중에 같은 반 아이들 엄마들과 이야기를 트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 대부분은 엄마였다. 미국은 고학력자 들일수록 결혼도 늦게 하고 아이도 늦게 낳는다더니, 대륙의 스케일은 역시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의사든 변호사든 간호사(미국에는 간호사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수년간 공부를 더 하고 전문성을 더 인정받는 직종도 있다)든 오랜 공부와 수련이 필요한 직업을 가진 여자들은 대개 공부가 끝날 때까지 결혼을 미뤘다. 그리고 30을 훌쩍 넘어 결혼한 이후에도, 딱히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결혼이 늦었으니 빨리 아이를 가져야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천천히 아이를 가져서 30대 중후반에 첫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아이를 서넛씩 낳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막내 같으면 40대 후반에 낳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큰 아이가 킨더가든에 들어갈 때 내가 서른셋이었는데, 나보다 열 살, 심지어 열다섯 살 많은 엄마들도 주변에 있었던 것은 그 탓이다. 이제 5학년이 된 아이네 반을 보면 50살은 훌쩍 넘긴 부모들도 꽤 있다. (심지어 우리 친정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아빠도 있다.)  


미국도 다른 모든 나라들처럼 여성들이 첫 아이를 낳는 연령이 늦춰지는 추세다. 미국은 26세, 한국은 31세(2016년 기준) 그런데 재미있게도 미국의 경우 출산연령 그래프가 쌍봉낙타와 같은 형태를 보인다. 즉, 나이별로 막대그래프를 그려놓고 보면, 20세에 첫 출산을 하는 사람들과 29세에 첫 출산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비슷하게 가장 높다. 학력이 높을수록 첫 출산이 늦고, 낮을수록 빠르다. 동부나 서부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늦고, 남부나 중부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빠르다. 지역에 따라서 엄마들의 나이가 20살도 차이 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40살에 첫 아이를 낳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첫사랑 (high school sweetheart)과 결혼해서 19살부터 줄줄이 아이를 낳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이런 추세로 2대, 3대 계속되면 40살에 할머니가 되고, 60살에 증조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피츠버그도 중부에 가까운 동부이다 보니, 도시 밖으로 나가면 스물도 안된 앳된 엄마들이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18살에 낳든, 40살에 낳든, 개인의 선택이다. 물론 그들의 아주 내밀한 속내까지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아직 내가 '내 욕심 챙기느라 내가 늦게 낳은 것 같아서' 죄책감에 시달리지도 않고, '너를 낳느라 내가 포기한 것들'에 크게 연연하지도 않는다. 대학원 친구들 중에 그애들이 20대 후반일 때 이미 부모님들이 60대 중반, 70대에 들어서신 경우가 꽤 많았는데 그애들이 우리 엄마 아빠는 왜 이렇게 늙었을까, 하며 한탄하는 경우도 보지 못했다. 미국이 한국보다 결코 워킹맘에게 유리한 환경이어서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출산휴가조차 법으로 보장되지 않는 곳이 미국이다. 하지만 부부, 특히 엄마, 가 스스로 고민하고 준비되었을 때 출산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러한 스트레스가 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면 여전히 한국에서는 가족과 사회의 압박 때문에 고민하는 여성들이 많다. 결혼을 하면 출산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어차피 낳을 아이라면 빨리 낳는 게 좋다"라는 어른들 말씀도 스트레스고, 난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도 늘어가는 것 같아 겁이 난다. 거기에 젊은 엄마가 낳는 아이가 건강하다 류의 잔소리까지 겹치면 내 꿈이 뭐라고, 하찮아 보일 수도 있다.


만일 내 딸이 나중에 출산과 꿈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나는 그래도 "난자 얼리면 되지!"라고 이야기해 줄 것이다. 요즘 미국 전문직 여성들이 많이들 한다고 한다: 냉동난자. 꿈은 20살에도 60살에도 추구할 수 있지만, 그때가 아니면 돌아오지 않는 기회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해 보니 그랬다.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만 28살이었고, 와튼 1학년을 끝내고 임신 때문에 1년간 휴학을 한 상황이었다. 사실 어느 누구도 나와 남편에게 빨리 결혼해라, 빨리 아이를 가져라,라고 압박을 주지 않았는데도, 마치 숙제가 밀릴까 봐 초조한 초등학생처럼 급하게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고, 학교를 졸업하고, 둘째를 낳았다. 1년씩 기간을 두고. 사실 육아와 학교생활쯤은 손쉽게 병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육아가 다른 어떤 활동과 동일한 우선순위에 놓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것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MBA 네트워킹 활동이라는 게 꼭 가서 그날 당장 일자리를 얻어올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연락처를 얻고 관심을 피력하는 간접적인 활동이라는 것, 그래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갓난아이 앞에서 꼭 내가 가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학교 행사에 참석을 포기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가 컨디션이 좋은 날도 그런데, 열이라도 나고 유난히 보채기라도 하는 날이면 수업도 포기할 때도 있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아기들은 놀라운 촉을 갖고 태어나 종일 잘 놀다가도 엄마가 자리를 비우려 할 때면 예민하게 굴기 시작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커리어란 놈에게도 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참 날아가다가 엔진이 쉬게 되면 그래도 관성 덕에 약간은 앞으로 갈 수 있지만, 발사 단계에서 점화 스위치가 자꾸 켜졌다 꺼졌다 하면 아예 날아오르지 못하게 된다.


내 딸의 가족계획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괜히 결혼을 했으니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사회적인 압박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30살, 40살이 될 때까지 그저 꿈을 보고 추구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을 때까지는 초조해하거나,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만일 과학의 힘이 도움이 된다면, 그때는 냉동난자도 고려해 봐도 좋고.  

이전 07화 와튼 MBA를 졸업하다. 백수로.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