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영어는 술술
이모부는 천재였다. 자라는 내내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경기고, 서울의대를 졸업한 후 70년대 의사 이민의 물결을 타고 일찌감치 미국에 정착했다. 수련을 마치고 형편이 펴자마자 당시 이민 1세대들이 으레 그랬듯 부지런히 동생들과 처가 식구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외삼촌이 먼저 떠나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곧 장남 뒤를 따랐다. 그 사이 결혼한 엄마만 아빠와 고민 끝에 홀로 한국에 남았다.
외갓집 식구를 모르다시피 자란 내가 제대로 이모부를 만나게 된 건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였다. 이모부는 열 살짜리 눈에도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160cm가 갓 넘을 정도의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눈에는 광채 같은 총기가 있었다. 까랑까랑한 목소리는 지나던 미국인들도 뒤돌아볼 만큼 컸지만, 말투는 친절했다. 아나운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발음이 또박또박 분명해서, 이모부 말을 듣고 있으면 우리 집에서 쓰는 서울말은 표준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난생처음 보는 미국이 궁금했던 내가 질문이라도 하면, 줄줄이 꿰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끝없이 이어지는 답변에 지친 이모가 매번 아는 척 그만하라고 핀잔을 줬다. 어쨋든 이모부에게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었다. 이모네 가족은 멋진 2층 집에 살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티비에서도 본 적 없는 그림같은 수영장이 딸려 있었다 (1990년이었다). 피자든 스테이크든 모든 것이 큼직하고 풍요로워 보였던 미국의 음식점에서는 주문도 척척, 계산도 척척, 모두 이모부가 해결했다. 한국 바깥의 세상을 처음 본 내게는 모든 것이 별세상처럼 느껴졌다 - 그리고 이모부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능력자였다.
막내인 엄마보다 무려 14살이나 많은 이모와는 진해 군항제 때 만났다고 했다. 낭만은 1930년대에 태어난 이들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이모가 친구들과 군항제를 보려 진해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해군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지역으로 돌아가던 이모부와 마주쳤다. 첫눈에 반한 이모부의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했지만, 이모부의 고집과 불같은 성미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노라며 이모는 진저리를 쳤다. 성격이 안 맞는다고, 어쩜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냐며 둘은 늘 투닥거렸지만, 이모부는 내심 멋쟁이 마누라를 늘 자랑스러워했다. 이모도 그걸 알아서인지 집안에서도 늘 곱게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그랬던 이모부가 치매에 걸렸다. 본인 병원을 접은 후에도 바지런히 나가던 계약직 의대 강의를 접은 지 5년 만이었다. 연세가 팔순이니, '치매 걸리기 너무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의 치매 소식은 유달리 우리 가족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건망증처럼 시작한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선이 너덜너덜해진 유선전화기를 테이프로 붙여 쓰고, 디젤 세단을 20년 넘게 몰 정도로 알뜰했던 사람이 멀쩡한 냉장고와 1년밖에 안된 차를 두고 새 냉장고와 새 차를 사 들였다. 이모는 평생 경제권을 가져본 적이 없어 계좌에 얼마가 있는지, 돈 백 불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감이 전혀 없었다. 바로 옆집에 살던 외삼촌이 재정 매니저가 되어 팔순의 누나 부부를 가르치고, 때로는 잔소리를 하며 도와야 했다.
2년 전, 이모부보다 한참 젊은 외삼촌이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무거운 마음으로 장례식 참석차 날아간 LA에서 치매 발병 이후 이모부를 처음 만났다. 전보다 총기가 서린 눈빛은 누그러졌지만, 얼굴에는 예전보다 훨씬 크고 넉넉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모부는 한국에서 도착한 엄마와 한참을 반갑게 이야기하다 막바지에 "그런데 누구신지...?"라고 물었다. 엄마도 나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투닥거리던 아내와 이제는 마치 엄마와 어린 아들처럼, 어디든 손을 잡고 함께 했다. 늘 웃음 가득한 얼굴로 온순하게 차에 타라면 타고, 식사를 차려주면 먹고, 잘 시간이라고 하면 잠들었다. 장례식장에 만난 손님들에게도 반갑게 말을 붙였는데 신기하게도 미국인들과는 영어로 이야기했다. 가족 모두가 함께 들른 식당에서도 우리 테이블을 맡은 담당 웨이터와 한참 동안 유머까지 섞어가며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그 웨이터는 이모부가 그저 수다스러운 손님일 뿐, 치매인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음식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떠난 후, 이모부는 그 사람과 한 이야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모부는 늘 기분이 좋았다. 이모 곁에 있으면 늘 편안해 보였다. 며칠을 지켜보며 어쩌면 이모부에게는 지금이 낯선 이방인의 땅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40년 만에 처음 맞는 휴식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책임질 게 많았던 인생이었다. 아내와 아들 셋, 친동생들, 처남과 장인 장모까지 미국으로 데려온 사람도 그였으니, 이 사람들이 살 곳을 마련하고, 직업을 구하고, 먹고살게 하는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누가 직장에서 사고라도 치거나 경찰이 필요한 일이 생길 때 중간에서 통역이 가능한 것도 이모부 뿐이었다. 한국의 막내 처제 - 우리 엄마 - 의 대학 학비마저 이모부가 전담했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까지도 영어를 놓지 못하는 걸까. 인종차별이 잘못된 거라는 의식조차 거의 없었던 시절, 한국에서 온 160cm의 작은 남자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 그리고 아무리 천재라도 모국어가 아니니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 - 영어는 무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수재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양쪽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애당초 적었다면, 조금은 어깨 위의 부담이 가벼워졌을까.
어제 이모에게 전화를 하니, 요즘 이모부는 저녁식사 후 혼자 조용히 차고로 가 자동차 운전석에 앉는다고 한다. 이모가 "당신, 어디 가?"라고 물으면 "응, 가야지"라고 대답하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대답하지 못한다. 시동을 어떻게 거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항상 바쁘게 살았던 삶이 마음의 관성으로 남았나 보다. 이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아내 옆에서 휴식의 시간을 만끽하시기를 소망한다.
p.s. 이 글을 쓰고 3년 후 이모부는 영원한 안식에 드셨습니다. 그의 치열했던 삶을 추모하며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