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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칼 May 31. 2021

중국의 별, 강남의 별, 대만의 별

2017년 10월 2일(2일째)-난징 총통부, 중산릉, 1912 거리

지하철에서도 검문검색

숙소에서 일어나서 바라본 상하이 시내는 정적이 흘렀다. 어제의 그 수많은 인파는 다들 어디로 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거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난징시루 역으로 갔다. 이동할 때마다 느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검문검색이 참 많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인력을 참 많이 쓴다는 것이었다. 일단 중국에서는 공항, 관공서, 박물관, 역 등 국가 시설은 물론이고 거미줄처럼 깔린 지하철 역사에서도 검문검색을 했다. 검문검색도 간단히 짐 검사 정도가 아니라 작은 가방이라도 검색대에 올려서 확인하고 온 몸을 수색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모든 확인을 사람들이 했기 때문에 인력을 많이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러 위협으로 인해 유럽에서도 유명한 관광지 안에서 검문검색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 디테일을 가진 검문검색은 사회주의 국가에다가 인구가 많은 나라이기에 가능한 일 같았다. 난징시루 역에서 아이가 안으로 들어갈 때는 자기가 표를 찍고 혼자 들어가고 싶다고  어깨에서 뛰어내리려고 하고 를 옆으로 가라고 밀고 결국에는 자기 혼자 카드 찍고 안으로 들어와 버려서 는 개찰구를 다시 넘어서 들어와야 했다.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안된다고 하면서 화내니까 아이는 삐져서 울었다. 사리분별이 될 정도로 컸다고 생각 한 아이와의 해외여행이 이제는 수월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큰 만큼 자기도 하고 싶은 것이 생겨서 난감한 구석이 생기는구나 싶었다. 이러다가 사고가 날까 봐 남은 시간 동안 사고 없이 안전하게 보내고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공항 같던 상하이 역

난징(南京)으로 갈 상하이 역에 도착하니 드넓은 남쪽 광장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난징으로 갔는데 상하이 역내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도 줄이 엄청 길었다. 워낙 줄이 길어서 꼭 놀이공원 입장하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통로를 따라서 입장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진 검문검색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사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자리를 겨우 잡아서 간단히 커피와 간식을 즐기면서 한숨 돌렸다. 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진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디를 다들 가는지 역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아이를 잃어버릴까 봐 손을 꼭 잡고 다녔다.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은 다음에서야 긴장이 풀렸다. 여행 내내 이렇게 긴장하면서 걷고 이동한 적은 처음인 듯했다. 기차에서 내리고 난징 역 밖으로 나온 난징은 휴일이라 그런지 역시 인파가 엄청났다. 어딜 가나 사람, 사람, 사람이었다. 


상하이 역에서도 검문검색

상하이와는 다르게 난징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맞고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여서 일단 중국의 고도(古都) 난징의 거리를 눈에 담아보았다. 난징은 중국의 7대 고도 중 하나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나라 손권이 최초로 수도로 삼았다. 그때 당시에는 건업(建業)이라고 불렀다. 난징의 명칭은 예전엔 금릉(金陵), 건강(建康)이라고 불리었는데 명나라가 세워지고 이곳이 수도로 되면서 난징이라는 명칭이 굳어졌다. 그 후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의 지위를 잃게 되었고, 1928년 장제스의 중화민국으로 다시 수도로 정해진다. 이때 벌어진 사건이 난징대학살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그 문서가 지정되기도 했는데 1937년 12월에 침략한 일본군이 무려 한 달 반 정도 되는 기간 동안 국민당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대략 30만 명에 달하는 인류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이다. 난징 거리를 걸어가면서 이 평범한 거리에서 80년 전에는 살해, 방화, 강간 등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한 방법은 다 동원한 듯한 이 학살이 일어났고 임산부, 어린아이도 많이 희생되었다고 재미로 사람을 죽이고 죽인 후에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능욕했다고 하니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나로서는 더 큰 분노와 슬픔이 느껴졌다.


난징 총통부

우리가 처음 방문한 곳은 난징 총통부(南京總統府)였다. 가는 길에 난징 도서관의 거대한 위용이 나타났는데 난징 도서관은 1907년에 지어져서 오랜 역사를 자랑했다. 중국 국가 도서관과 상하이 도서관에 이어 3번째로 거대한 도서관으로 1,000만 권이 넘는 장서가 있다고 했다. 도서관을 지나 나타난 금색으로 빛나는 굵은 글씨가 인상적인 총통부는 앞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난징을 수도로 삼은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사용한 건물로 국민정부가 1927년부터 1937년까지 사용하고 중일전쟁으로 인해 피신해있다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5년부터 다시 사용하고 국공내전으로 공산당에 밀려 후퇴한 1949년까지 사용한 곳이었다. 중화민국은 난징에서 남쪽인 광저우로 후퇴했다가 서쪽인 충칭, 청두까지 후퇴했다가 우리가 아는 대만 타이베이로 밀리게 된다. 장제스의 이런 후퇴 과정을 국부천대(國府遷臺)라고 한다. 난징 총통부는 이후 중국에서 박물관으로 1998년에 개관하게 되었다. 이곳은 청나라 때 태평천국운동을 일으킨 홍수전의 근거지여서 이때 홍수전이 앉았던 의자도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총통부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런 인파 속에서 무념무상하며 기다린 시간이 여행의 절반은 되는 듯했다. 


난징 도서관

난징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말할 필요 없이 쑨원이다. 쑨원은 청나라 이후 중화민국,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으로 건너 간 중화민국에서 말할 필요 없이 국부로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을 말하라고 하면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을 드는데 둘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 않은 인물이 바로 쑨원으로 청나라를 무너트린 신해혁명 이후 1912년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위안 스카이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부침이 있었지만 군벌의 난립 속에서 통일된 중국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삼민주의와 혁명에 대해 중화권은 존경을 표하고 그 존경심에 대한 표현이 난징 교외의 자금산에 위치한 중산릉이다. 황제도 아닌 일개 인물에게 릉이란 표현을 쓴 것 자체가 중국인들의 존경심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중산릉은 1929년에 완공되었는데 길이가 7km,  너비가 6.6km에 달하는 어머어마한 규모를 자랑해 중국의 여타 황제들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


이색 경험을 한 훠궈 식사

핫플레이스인 1912 거리에서 밥 먹고 차를 셨다. 1912는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된 1912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수도가 바로 난징이었다. 어느 도시에나 있을 법한 번화가지만 옛 거리 속에서 새롭게 탈바꿈해서 보이는 것이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어서 눈길을 끄는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훠궈 식당을 갔는데 맛집인지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종업원이 전혀 영어를 못해서 조금 난감했지만 핸드폰 통역 어플을 이용해 음식 추천을 받았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통했는지 생새우, 완자, 소고기, 두부, 튀김 두부와 천엽, 이름 모를 내장까지 다소 특색 있는 음식들이 나와 기분 좋게 먹었다. 홍탕과 백탕으로 해서 맵지 않은 것은 아이에게 줬는데 잘 먹었다. 물론 세련되고 좋은 가게라 그런지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아니면 우리가 중국어를 모르는 여행객이라 추천을 가격대가 있는 건만 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추천을 잘 받아서 맛있게 먹고 나왔으니 다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다. 


분위기 좋은 카페

근처에 있는 유명한 카페를 아내가 찾아서 갔는데 그 카페 내부가 도서관과 숲을 섞어 놓은 듯한 인상을 줘서 독특하면서 개방감이 있는 카페라는 느낌을 받았다. 주문하고 인형을 놓고서 기다리는 것이 독특했고 분위기도 좋고 커피도 좋았지만 역시나 영어가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상하이에서는 그래도 영어가 통했는데 여기서는 통하지 않으니 갑갑했지만 내국인만으로도 충분한 수요가 돼서 그런가 싶었다. 신용카드도 안되고, 현금을 받을 때는 고액권인 경우 위조지폐인지 확인하고, 여행 때 필수적으로 쓰는 구글 지도 어플도 안되고 여러모로 불편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자국인들에게 유튜브, 구글 등 사이트에 대해 금지해서 구글 지도를 쓰지 못하고 바이두 지도 어플을 사용하느라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비 오는 난징을 뒤로하고 상하이로 돌아가려고 1912 거리에서 난징 지하철역까지 가는데 늦을까 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비 오는 거리를 아이를 안고 엄청 뛰면서 갔는데 인파가 워낙 많아서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내 여행 인생을 통틀어서 어떤 의미로 심장이 짜릿했던 때를 꼽으라면 단연 이때를 꼽을 수 있다. 인파로 꽉 찬 지하철 역사여서 표를 발권하는 데에만 시간이 상당히 걸렸고, 그 인파를 뚫고 지하철을 타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이를 안고 헤엄치듯 사람들 사이를 빠져서 겨우 지하철을 탈 수 있었고 난징 역에서 다행히 상하이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중국은 정말 대륙이었음을 실감했다.

1912 거리


난징 시가지




난징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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