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분 25초 동안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 떠올려 본 단상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음악과 함께 읽어보세요.
발끝까지 얼어붙을 듯 한 매서운 추위에 옷깃을 여며 코까지 가린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전철이 오랫동안 연착을 한다. 바쁜 출근시간이라 밀려드는 사람들은 많은데 앞줄에 선 사람들이 전철을 타고 빠져나가질 못해 승강장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하필 오늘 중요한 발표가 있어 정장을 입고 나와 다리엔 얇은 스타킹만이 추위를 막아줄 뿐이다. 보는 사람들이 없다면 두 손으로 종아리를 비벼대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스피커에서 반가운 멘트가 들리고 사람들은 철가루에 자석을 댄 것처럼 지하철 문을 향해 일제히 이동을 한다. 비교적 앞에 서 있었지만 서서히 들어오는 전철 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문이 열리자 뒷사람들의 힘에 밀려 전철 안으로 나도 모르게 들어간다. 한 권도 더 꽂을 수 없는 책꽂이의 책 마냥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출발하는 전철의 흔들림을 온몸으로 느낀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몸을 흔들어 가슴 쪽으로 끌어안으며 고개를 들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이미 내 얼굴은 누군가의 등에 매정하게 처박혀 버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이 빠져버리고 사방이 나를 밀어대는 힘에 기대어 겨우 선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갖고 나오는 건데...'
새벽잠을 못 이겨 러시아워 시간을 피하지 못해 전철로 향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진다.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발표 준비를 하려 했는데 평소보다 더 늦게 생겼다.
[김대리. 지하철이 많이 연착이라 나 좀 늦을 듯. 미안.
프린트물 챙겨놓고 나 도착하면 바로 고객사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줘.]
사람들 틈을 비집고 핸드폰을 꺼내메시지를 남긴다.
온 힘이 다 빠진다. 잠시 앞사람 등에 고개를 기댄다. 앞사람이 두른 목도리 끝에 내 얼굴이 닿는다.
'어...'
갑자기 몸이 얼어붙는다. 앞사람의 실루엣을 고개를 들어 확인한다.
'에이... 왜 이래 새삼.'
설마 하는 생각에 다시 그 목도리에 얼굴을 대 본다.
'아닐 거야. 이러지 좀 마.'
가슴 한켠이 뾰족한 유리에 찔린 듯 아프다. 피라도 흐르는 듯 가슴을 움켜쥔다. 숨을 크게 내쉬며 스스로 진정하라고 정신 차리라고 속으로 외친다. 아무리 그래도 맘처럼 쉽게 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목도리에 배어있는 누군가의 체취로 세월의 힘으로 겨우 잠가놓았던 기억의 문이 힘없이 열려 버렸다.
......
그녀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다. 어떤 책장은 빈틈없이 빼곡히 책들이 꽂아져 있고 어떤 책장엔 덩그러니 몇 권이 먼지가 쌓인 채 넘어져 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책장 하나에는 두꺼운 유리문이 열쇠로 잠긴 채 봉인이 되어있다. 아무리 봉인이 되어 있어도 빛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빛나는 책들이다. 먼지 하나 쌓여있지 않은 어제 꽂아둔 것 같은 책들은 빛바램으로 원래의 색보다 흐려졌지만 책 속의 글들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너무도 선명해 처음 그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마음속 페이지 하나하나에 쓰인 삶의 이야기들은 때로는 단편 또는 장편이 되어 상황에 따라 조용히 그 위치를 옮겨 다닌다. 언젠가 '설렘'이라는 책장에 있던 책이 지금은 '추억'이라는 책장에 머물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책장에 있던 책이 '원망'과 '미움'으로 옮겨갔다가 '그리움'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아직 '그리움'으로 정리되지 못한 책들은 '간절함'을 거쳐 결국 '슬픔'과 '괴로움'사이를 오가며 유리문 속 책장에 봉인이 된다.
유리문 속 책장에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한 감정들이 담긴다. 시간의 힘으로 겨우 덮은 책들이 꽂힌다. '현재의 삶'을 '현재의 삶'으로 영위해 나가라고 마음이 배려를 해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과거의 삶' 속에서 여전히 허우적 대는 '현재의 삶'을 마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움', '추억' 또는 '이해'로 옮겨갔을 것이라 생각했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단편이 유리에 찔린 것처럼 아프고 괴로울 때면 마음속 책장에서 잠가두었던 유리문을 깨트리며 봉인된 책 하나가 펼쳐졌음을 느낀다.
유리장 안에 봉인된 그 책들은 펼치자마자 그때의 상황 그대로를 생생하게 소환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것들이다.
가장 최근에는 '이해' 영역으로 넘어간 줄 알았던 가족에 대한 책이 '서러움'으로 폭발해 오랜 시간 봉인되어있던 유리문을 깨트리며 펼쳐져 그녀는큰 상처를 입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그녀 안에 있던 가여운 모습을 다시 생생하게 마주하며 많이도 울고 힘들어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녀는 한 명이지만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두 사람의 삶을 산다. 후배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멋진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삶. 그리고 과거의 시간에서 조금도 헤어 나오지 못한 상처 받은 작고 여린 아이의 삶.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는 그녀 안에 숨겨진 외롭고 가여운 아이는 혼자서 그렇게 울부짖고, 하소연하고, 스스로를 토닥이다 힘들게 힘들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어주고 공감해주고 나니 다시금 조용히 책장 속에 꽂혔다. 이제 그녀는 그녀만의 방법들이 생겼다. 그 어떤 빛이 마음에 들어와도 그 책장을 비추지 않게 옆으로 비스듬히 피하는 방법. 예상치 못한 자극에 유리가 충격을 받아도 두꺼운 이불로 덮어 자극에 무뎌지게 하는 방법들이...
온몸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마법의 음식을 찾아냈고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피해야 하는 가수들의 노래 목록이 생겼다. 이제 어느 정도의 자극은 그녀가 그녀의 "현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스스로 통제가 가능해졌다. 그녀는 그걸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세월이 가진 힘"이라 여겼다. 그게 바로 여러 사람들이 겪고 결론 내린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의 의미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는 '현재의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나갔다. 그 노력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고 능력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걸로 그녀는 스스로를 보상했다. 그거면 되었다.
......
흐릿한 체취 하나로 다시 유리문이 깨졌음을 직감한다. 깨진 유리조각이 여린 살 곳곳에 박힌다. 이미 펼쳐진 책은 마지막 글자까지 읽어내야 다시 덮인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피하려 눈을 감아도 눈 감은 그 페이지에 그대로 멈출 뿐이다. 기억이란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건너뛰는 법이 없다.
추운 겨울에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앳된 그녀와 다시 만난다. 다시 만난 어린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애달프다. 앳된 그녀의 눈앞에는 한 사람이 서있다. 한때 그녀삶의 모든 의미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의 삶 한구석을공유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도 노력하면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참 간절히도 그의 사랑을 갈구했고 결국엔 얻을 수 없는 그 사랑에 처절히 상처 받았다. 오랜 기간 침묵했던 과거의 앳된 그녀가 입을 연다.
'오랜만이네...
아무렇지 않은 척도 참 힘든 일이야. 언젠가 분명히 괜찮아질 거라고... 충분히 울고 나면 너의 사랑이 내가 아니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조금 무뎌질 뿐인가 봐. 다시 생각이 나면 사무쳐지는 건 똑같네. 사랑하고 싶다고 해서 뜻대로 잘 안 되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도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게 사랑인가 봐.
너를 내려놓을게.
이쯤이면 된 거야라고 생각했다가도, 차라지 만나지 말았더라면...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을 텐데... 라며 자꾸 너를 원망하게 돼.
언제쯤 너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생길까? 언제쯤이면 내 꿈이 널 밀어낼 수 있을까?
그땐 깨지 않는 잠을 잘 수 있을까?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던데 널 너무 사랑해서 동시에 널 미워하게 되는 내가 또 밉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에게 닿지 않는다. 눈앞의 그 사람이 조용히 뒤를 돌아 멀어진다. 붙잡지 못하는 그녀는 그냥 그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만 볼뿐이다.
"이번 역은 서울역 지하 서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당고개, 사당, 오이도 방면으로..."
지하철 방송이 그녀를 다시 현실의 삶으로 인도한다. 사람들이 모두 한쪽으로 쏠리고 나서 전철 문이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 목도리도 전철 밖의 사람들 속에 묻혀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울고 있는 앳된 소녀를 달랜다. 그때처럼 그녀는 다시 혼자 남겨진다.
현실의 그녀는 현실의 하루를 보낸다. 조금 늦었지만 준비했던 발표를 무사히 마친다. 웃으며 후배와 식사를 하고 좋아하는 커피를 마신다. 피곤해 보인다는 후배의 말에 아침에 너무 고생해서 그렇다고 웃어넘긴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현실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그녀는 외롭게 홀로 기다리고 있는 어린 그녀를 다시 만난다. 오랜 시간 넘기지 못했던 펼쳐진 마음속 페이지를 마주한다. 아무리 애써도 사라지지 않는 괴로움과 슬픔을 마주한다. 아직도 생생한 그 감정들을 보듬어준다.
유리문을 깨고 나온 그 책을 집어 든다. 마음속 책, 빈 페이지에 앙금처럼 남은 마음을 적는다. 이미 잊힌 내가 언젠가 잊힐 그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그 목도리에서 나던 너의 향기는 너무나 익숙했고 내 마음은 또다시 출렁였어. 사진을 찍듯이 그 향기를 간직하고 가끔 맡아볼 수는 없는 걸까 하고 생각했어. 여전히 너는 너무 사랑스러웠고 여전히 밝았지.
나에게 설렘을 줘서 고마웠어. 나의 마음을 너는 외면했지만, 너의 마음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받지 않기를 바라. 나의 삶 속에 잔잔하게 숨어있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 후회 없이 보내줄게. 고마워.
너는 나의 20대였어.'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가수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의 노래에 달린 수백 개의 유튜브 댓글 중 마음을 울리는 글들을 읽고 상상해 본 '그녀'의 하루입니다. 과거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가 하는 '독백'은 유튜브에 적힌 댓글들을 인용해 하나의 이야기처럼 각색을 했습니다. 지나간 사랑에 아파했었던분들의 마음을 노래와 글로 위로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