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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망 Sep 15. 2021

"숫자"

[음악단편소설] feat. 가수 '이적'의 '숫자'

https://youtu.be/cyE9VaWARbk



3분 56초 동안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 떠올려 본 단상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음악과 함께 읽어보세요.




그는 무엇이든 잘 잊는 아이였다. 학교에 다닐 땐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그 자리에 책가방을 고스란히 두고 학교로 간 적도 많았다. 새벽같이 돈을 벌러 나가는 어머니는 놓고 온 그의 책가방을 학교로 다시 가져다 줄 수가 없었다. 그런 날에 그는 학교에서 하루 종일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이 멀뚱멀뚱 앉아만 있다가 집으로 왔다. 한두 번이 아닌 이 실수가 반복되니 하루는 어머니가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시고는 이제부터는 학교에 가방을 두고 와도 된다고 말씀을 해 주셨다. 대신 숙제도 학교에서 다 하고 집에 가야 한다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원을 가야 하는 아이들과 달리 별 할 일이 없던 그는 조용한 교실에 앉아서 그가 하고 싶은 숙제들을 끄적이다가 대충 서랍에 넣어두고 집에 오곤 했다. 제때 못한 숙제는 검사 시간에 조금 혼나면 그만이었다. 가끔 조금 크게 혼이 날 때도 있지만 그 시간 동안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으면 견딜만했다.


말수가 별로 없던 그는 가방도 안 들고 다니며 학교에 다니는 괴짜라는 말을 들으며 지냈지만 아이들 무리에 끼지 않으니 필요 없는 방해를 받지 않아 오히려 딴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친구가 없던 그는 심심해지면 도서관에 갔다. 집에는 책이 없었다.


빠듯했던 살림에 늘 바빴던 어머니는 가끔 집에 오시는 길에 그를 불러 아이스크림을 사 주셨다. 해 질 녘 낡은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나누어 먹으며 학교생활이 어떤지 물어보시면 그의 대답은 늘 같았다.


"응. 잘 지내 엄마."


책가방을 집으로 들고 오질 않으니 집에서 어머니와 공부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배움이 길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에게 공부하라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열심히 살라는 말씀은 종종 하셨다. 어머니는 아무리 피곤해도 거칠거칠한 손으로 매일 밤 그를 씻겨주셨다. 혼자 씻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그는 스스로 씻지 않고 어머니의 손길을 기다렸다. "우리 아가 많이 컸네." 하시며 온몸 구석구석을 비누칠해 주시는 그 손길이 좋았다. 깨끗하게 닦고 난 후 날근날근 구멍 난 잠옷을 입고 어머니의 팔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사실 그에게 일상의 많은 것들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년과 올해도 그리 다르지 않았고 앞으로 다가올 내년도 크게 다를 것 같지가 않다. 만약 태어났던 때가 기억이 난다면 그때의 하루와 지금의 하루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그에게는 잊어서는 안 되는 큰일 날 것이 별로 없었다. 잃어버리면 안 될 아주 귀한 것도 없었다. 가난한 그의 집에는 없어지면 큰일 날 것도 없어 현관문을 깜빡하고 열어두고 학교에 가도 크게 걱정이 되질 않았다.


늘 그대로였던 그는 고등학생이 되니 오히려 평범한 학생이 되어있었다. 그의 일상은 그대로였지만 주변의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으며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늘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왔던 그는 머리가 굵어지며 가방 정도는 챙겨서 학교에 가게 되었다. 다양한 담임선생님을 만나면서 아무것도 못 챙겨 오면 하루가 피곤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가며 점차 그는 의도치 않게 타인들의 눈에 "평온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남의 실수에도 너그럽고 그의 실수에도 너그러운 사람이었으니까. 마음에 앙금으로 남은 것도 없으니 늘 처음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에게만은 털어놓을 수 있겠다며 상담을 하는 녀석도 있었다. 대부분의 고민이 그에게는 고민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냥 잠시 딴생각을 하면서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진정한 친구라며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처음 월급을 받고 집에 돌아온 그를 안고 한참을 우셨다. 어머니께 좋은 옷을 사드렸다. 어머니에게도 이제는 아끼는 것들이 생겼다. 그한테도 잃어버리면 아쉬울 것들이 하나둘 생겼다. 자주는 아니어도 갖고 싶은 것을 갖게 되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녀'가 그의 삶에 들어오며 늘 같았던 그의 일상은 송두리째 달라지기 시작했다.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생겼다. 백지처럼 하얗게 비워져 있던 그의 삶에 '추억'이란 게 적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그를 보고 웃던 날, 그들이 처음 손을 잡은 날, 처음으로 영화를 같이 본 날, 첫 키스를 한 날...

그는 이 강렬한 감정들을 잊게 될까 두려다. 이 감정들이, 기억들이 사라지면 그녀도 사라지게 될 것만 같았다. 유년시절 늘 근무태만이었던 그의 기억력은 이제야 기지개를 켜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뇌 속 신경세포는 이제야 존재의 이유를 찾은 듯했다. 사소한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남았다. 모든 게 처음인 그는 애써 지워낼 것도 없었다. 하루하루 함께 한 모든 것이 비석에 새겨진 글씨처럼 또렷하게 마음속에 기록이 되었다.


 그녀가 가진 사소한 습관을 그가 먼저 기억해 챙기고 생각지 못한 기념일에 작은 선물을 건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며 환히 웃다. 그의 마음에도 빛이 차올랐다.


매일매일이 몇 번째 기념일인지...

이번이 몇 번째 그녀가 그에게 먼저 걸어온 날인지...

밤을 새워 가장 오래 통화한 시간이 언제인지...

그때 전화를 몇 시에 끊었는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새로운 노트에 첫 기록을 남기듯 선명하 모든 일들이 그에게 남겨졌다.

이제야 소중한 것을 찾게 된 그의 모든 세포와 신경은 모두 정말 '열심히'  역할을 수행했다. 매일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기록이 되었다.


 사소한 것 하나도 잊지 않는 건 늘 축복은 아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너무 사소해 그냥 잊어버리고 싶어도 그는 그게 되질 않았다. 그녀의 실수도, 무심함도, 둘 사이의 어긋남도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남아 노력하지 않아도 떠올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선물을 반기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 많아졌다.


무슨 대화 중에 그녀가 말을 멈추었는지...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게 몇 번째인지...

처음 말다툼을 한 게 언제인지...

이번이 몇 번째 말다툼인지...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뿌리친 게 몇 번째인지...


그렇게 그녀의 마음이 달라진 모든 차가운 행동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았다. 쓸데없이 고성능이 되어버린 그의 기억은 순간순간의 감정부터 그게 몇 번째 반복된 일상인지 시키지 않아도 자동으로 세고 있었다.


환하게 빛나던 그녀의 얼굴에 어느 날부터 어둠이 드리워졌다. 차가워진 그녀와의 시간 속에서도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에 기대어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설레고 따뜻했던 기억이 분량으로는 더 많이 기록되어 있어 차갑게 변한 그녀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기억의 기록에 눈이 멀어 현재의 감정을 부정했다.


이제 그들 시간은 그에게 수많은 숫자로 남겨졌다.


말없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있을 때 몇 번째 깜빡임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는지, 그리고 몇 개의 단어로 이별을 얘기했는지 그날의 기억 모두.


 그의 일상에 아무 의미 없는 숫자는 이제 없다. 밤에 일어나 무심코 시계를 보아도 그 시간은 더 이상 오늘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녀와 그가 지내왔던 과거의 시간이 오버랩되며 그는 그 시절 기억의 방에 덩그러니 갇히고 만다.


지워내지 못한 기억의 늪에 빠져 현재로 돌아오는 방법을 잃다.


갇힌 방에 가만히 앉아 자동으로 펼쳐지는 그녀와의 추억을 다시 하나 둘 세며 밤을 지새운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모두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생각을 멈추려고 해 봐도

내 안에 나도 모를 작은 방이 있나 봐


그곳에 웅크린 한 아이가

연필 하나 들고 써 내려가는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이제는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네가 걸어왔던 적은 몇 번이었나

우리가 봤던 영환 몇 편

커피에 시럽은 몇 번 눌러서 넣었나

우리 처음 키스를 나눴던 시각과

제일 길었던 통화 시간

내게 이별을 선언할 때의 눈 깜빡임


수없이 많았던 추억들을

감히 세어보려 밤을 지새 난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이제는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가사_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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