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 매사 소심하게 구는 그녀를 보며 던진 친구의 농담이었지만 숨기고 싶던 그녀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늘 거울을 볼 때마다 불만스러웠다. 그녀의 여유 없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까 두려워 쇼윈도에 비친 표정을 확인하며 미소를 연습하곤 했다.
마음만큼 소심했던 그녀의 얼굴이 오늘은 조금 달라 보인다.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며 살짝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댄다.아직 그때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 손 끝의 감촉을 조금 더 느낀다. 입술의 작은 떨림이 몇 시간 전으로 시간을 돌린다.
그녀가 좋아하던 바닷가 벤치에 그와 함께 앉아있다.
"좋아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밤하늘보다 더 까맣던 그의 눈동자에 뜬 별빛이 그녀의 눈으로 들어왔다.별들이 눈 속으로 쏟아져 내릴 것 만 같아 그만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익숙한 그의 향이 그녀 코 끝 가까이에 퍼졌고천천히 그의 입술이 그녀 입술 위에 닿았다.
잠시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의 아린 느낌이 전해진다. 그 아픔에 기대 스스로에게 되뇐다.
'지금은 진짜야. 이건 진짜라고...'
수 없이 많은 밤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그려내던 순간이다.간절히 원하던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한 그의 눈빛이 닿을 때도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늘 변함이 없었다. 모든 날 그녀가 바라 온 사랑의 주인공은 온통 그였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들킬까 두려워 늘 같은 미소와 같은 목소리로 그와 인사를 했다. 살면서 접하게 되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건 늘 그녀의 몫이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그의 마음은 감히 욕심 내보지도않았다. 그를 향한 마음이 혹여 밖으로 흘러나올까 두려워 절절한 마음의 절반은차갑게 집에 두고 나와도 하루를 보낸 끝자락엔 늘 그를 향해 더 커지기만 하는 마음을갖고 돌아가곤 했다. 그녀의 공간에는 늘어나기만 하는 그를 향한 마음을 더 이상 정리 해 둘 곳이 없었다.
닫힌 문을 밀고 있는 손을 떼면 정리 안된 옷들이터지듯 밀려 나오는 옷장처럼 매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와 인사를 나누고 밤마다 보내지 못한 수많은 편지만일기장에 남겼다.
전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인해 그녀의사랑은 수없는 밤혼자서이별을 겪었다. 욕심 낸 적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말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TV 속 드라마처럼 그와의 해피앤딩을 꿈꾸기도 했다.이렇게 시간이 흘러 이 사랑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된다 해도그녀의 설레는 마음은한결같이 그를 향했다.
좋아해...
오늘...
같은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마음속에 접힌 말이 너무나 많아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세상 어떤 단어들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그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기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마음을 전한다.
너무 행복한데...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온다.
너무 행복해도 눈물이 나는구나...
혼자서 기댈 곳 없이 외로워했던 그녀 자신을 찾아가 꼭 안아주고 싶다.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말들을 어르고 달래며 다 받아주었던 일기장이오늘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줄 것만 같다.
'이 행복을 내가 느껴도 되는 걸까...
내가 이 행운을 가져도 되는 걸까...'
두려움이 앞선다.
또다시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그의 손을 꼭 잡는다.
서로 말없이 손을 잡고 걸어간다.
저 멀리 파도소리도 잠들어 가는 바닷가모래사장에 둘만의 발자국을 남긴다.
'이건 꿈이 아니야.'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이 말해준다.
잠시 멈춰 서서 두 사람이 함께 걸어온 발자국을 애정을 담아 바라보며 마음에 사진으로 남긴다. 그녀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모래 위에 적힌다.함께...
저 멀리 별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온다.손 내밀면 잡힐 것 같은 별이 나풀나풀 춤을 춘다.
별을 닮은 반딧불이다.
반딧불이 날아 다시 하늘 위 별이 된다.잊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담아 인사를 전한다.
......
다 말라서 따뜻해진 머리카락이 가볍게찰랑거린다.목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간지럽다.손으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주워 휴지에 싸서 버린다.로션 뚜껑 위에 앉은 뽀얀 먼지를 닦아준다.그동안 그녀 눈에 머물지 못했던 방 안의 소소한 모습이 보인다.
주체할 수 없던 감정에 치여 살뜰히 챙기지 못한 그녀의 공간 속 모든 것이 흑백사진에 색이 채워지듯 그녀 눈에 들어온다. 정처 없이 뒹굴고 있는 물건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준다. 외로웠던 그녀를 말없이 품어 주었던 방 안의 모든 것들에 이제는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진 그녀의마음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