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디아이 Mar 13. 2024

'비교'는 원래 착했다

언니를 따라 잡기 위한 4살 동생의 처절한 뜀박질과 눈물은 순수한 열등감

학창 시절 선생님은 우등생을 칭찬하며 이런 말씀을 하곤 하셨다.

 

'친구에게 박수~~ 그리고 너희들 성적 좀 봐라."


평범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어딘가 이상해 보이지 않은가.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필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박수 후 이어진 비교의 말 대신 ‘너희들도 잘할 수 있어.’라고 우등생의 에너지를 시너지로 연결시켰다면 어땠을까. 선생님 또한 바람직한 언어를 배운 적이 없는 이유고 숙어처럼 자연스럽기만 하다. 그 우등생은 친구들의 선망과 동시에 시기를 샀다.

 

그뿐이랴. 시험을 마치고 나면 교실에선 수치스러운 일이 벌어지곤 했다.

수학, 영어 시간에는 우열반을 나누어 수업을 했는데 우반에 들지 못한 학생들은 자존감은 고사하고 자존심이 먼저 다쳤다. 시험을 망친 이유로 한우에 등급이 매겨지듯 열성 도장이 찍힌 채 옆 반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시작도 전에 패배자의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우열반이 사라지고 공교육의 체제가 달라졌을지라도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주변 지인 엄마들로부터 초등학교에 미술심리가 도입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또 다른 엄마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그림에 관해 선생님께 지적을 받았는데 이유를 들어보니 검은색 내지는 파란색 등 한 가지 색깔로만 도화지를 칠해버렸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이가 미술에 전혀 재능이 없고 문제가 있으니 미술학원에 다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덜컥 겁이 난 엄마는 아이에게 왜 그렇게 칠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주시는 주제로만 그림 그리기 싫어서.”

 

내가 보아 왔던 그 아이는 자기 주도성이 큰 아이였고 5,6살 때 자유롭게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내가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과목도 아니고 표현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예술 영역마저 숙고 없이 사교육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은 교육의 중심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모는 학교 시스템보다 교사 개개인의 역량과 성품에 의지해야 했다. 단편적으로 보이는 면을 평가하고 문제아가 될 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소수의 선생님들과 시스템의 존재는 자명한 사실이다.

 

미술심리상담학에서는 대중이 미술심리테스트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우려하는 부분이 있다.

상담을 받는 자의 어두운 면 만을 발견하고 걱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개선시키는 방식이다. 상담자는 어렵고 힘든 마음이 있는지를 인지할 뿐이고 마음 회복을 위한 긍정성을 찾아 이끌어 낸다. 미술활동 속 여러 가지 도구를 활용한 행위를 통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퇴행을 느끼고 안정을 느낀다. 나쁜 감정이 작품으로 배출되면 그림을 보고 걱정할 게 아니라 마음 치유의 길이 열린다고 봐야한다. 오히려 힘든 마음이 표출되지 못하고 마음 속에 꽁꽁 감춰놓는 걸 우려해야 한다. 언어로 좀처럼 표현할 수 없었던 어려운 마음을 비언어적인 형태로 마음 밖으로 끄집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또 한 가지 놀라운 뉴스로 초등 의대반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이들은 과도한 비교 경쟁으로 내몰았고 의대반을 위한 사교육 열풍이 이를 증명했다.

인간의 행복지수는 매우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등 떠미는 비교로 인한 성과지향은 1등 외에 모두를 열등한 존재로 만든다. 이렇게 자란 국민의 주관적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에 끝에서 4번째라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비교는 언제나 경쟁과 세트로 인식되어 왔다. 경쟁을 적대시하는 마음을 가진 채 경쟁을 해 왔으니 이중적인 마음에 대한 빚을 지고 살았다. 그런데 엄마로서 내 아이들과 주변 아이들을 보아 오면서 비교는 본래 순수한 자연적 본능이구나 싶었다. 언니의 날고뛰는 역량을 따라잡으려는 4살 동생의 처절한 뜀박질, 질 수밖에 없어 흘리는 눈물을 보면 그 에너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러운 열등감은 발전의 길로 연결되었다. 낮아 보이는 허들도 여러 번 넘으면 어른도 힘든 법인데 아이는 자기 키 만한 의자나 침대 매트리스, 안방으로 이어지는 베란다 담벼락을 끙끙대고 넘으며 매일 신체적 한계치를 갱신했다. 허들 넘기를 성공시킨 4살 어린이는 아름답게 착지한 체조선수처럼 사악~뒤를 돌아 뿌듯한 미소를 엄마인 내게 보내면 그걸로 자신의 노력이 충분히 보상받는다.

 

 

"네 웃는 목소리가 여기서 제일 시끄러워."

 

아이들이 많은 키즈카페나 광장에 가면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비교 비난이다. 웃음소리 마저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학교나 사회에서 받는 비교의 경우, 너무 과도하고 잦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괜찮다고 여긴다. 내 아이들도 여러 성향의 사람들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니까. 그러나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잦은 비교는 아이 자신이 스스로를 뿌리 깊게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부모님 또한 다수가 채택한 방식의 교육방식으로 나를 대하셨다. '너 외의 다른 사람의 평균은 이 정도야.'라는 잣대를 들이밀면 자녀가 똑바른 정신을 갖고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믿으셨다.


우리 부모뿐 아니라 다수 부모들의 훈육방식은 아이들 교우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학교 시절 친구 셋과 함께 하교를 하곤 했는데 그중 영미(가명)라는 친구가 도서실 청소 당번 날이었다. 그래서 영미의 청소가 끝나길 기다리며 또 다른 친구 혜교(가명)와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얼마 후 혜교가 책장들을 둘러보더니 몇몇 책들을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 지 몰라 물었더니 영미는 공부를 잘하니까 좋은 책을 읽고 더 똑똑해질까 봐 그랬다는 것이다. 장난 삼아 말했지만 순수한 웃음을 지녔던 친구가 멀게 느껴졌다. 혜교의 행동이 전혀 소용이 없는 게 영미는 이미 전교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데다 두껍고 어려운 유전공학책이나 문학책도 2시간 만에 간식 삼키듯 뚝딱 하는 친구다. 영미 집에 놀러 가면 영미는 친구랑 놀 때 영어 단어가 더 잘 외워진다는 소리를 해대는 종족이었다. 영미는 혜교가 책을 뒤집어 놓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난 뒤에도 그 행동을 귀엽게 생각한 대인배 마음의 소유자였다.

 

또 다른 일화가 있었다. 혜교네 집에 놀러 가서 번갈아 가며 함께 피아노를 치며 놀고 있었다. 외출했던 혜교의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시자 친구는 갑자기 근심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황급히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똑같이 피아노를 배웠는데 네가 더 잘 치잖아.

너 가고 난 다음에 엄마한테 비교당하면서 혼나거든."

 

혜교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어여쁜 친구였는데도 친구 어머니는 맏딸인 혜교의 모든 면이 완벽하고 탁월하기를 바라셨다. 친구와의 행복한 피아노 놀이 시간마저 비교 경쟁 구도로 바꿔 놓은 혜교의 엄마가 미워졌다. 놀이는 놀이 그 자체로서 즐거워야 한다.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말이 있다. 잘 노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조절을 잘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정서지능이 발달한 사람이다.


 

"너의 성과는 정말 대단하다. 나는 여태까지 뭐 했나."

 

자학성 비교 습관을 인지한 건 남을 높여준다는 명목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비하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다. 상대에게 대단하다고 감탄 후 끝내면 될 일인데

'나는 여태 뭐 했나.'를 덧붙이는 것 또한 숙어처럼 자연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능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 비교, 자학 구도로 웃음을 유발하는 콩트나 대사가 많았다. 용기 있는 누군가가 문제제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사회인식이 변화했고 퇴출됐다. 그게 잘못된 말 습관인 줄도 몰랐다. 무지가 안타까운 건 본인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나의 무지를 고백하자면, 나는 자책만 했지 남에게는 관대한 줄 알았다. 그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건 결혼 후 남편을 대하는 행동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뇌과학 연구에서 스캐너로 뇌를 촬영하여 반응을 보면 ‘나를 인식하는 영역’과 ‘나와 가까운 가족’이 반응하는 영역이 같다고 한다. 남편과 점점 일심동체가 되면서 남편을 나로 인식하게 되었다. 나에게 하듯 남편에게도 비교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분명 남편은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는 나쁜 습관을 비교를 해서라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똑같은 언어 방식으로 나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속상한 감정을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표현해 주었다. 심리학을 기반한 뇌과학적 설명을 접하고 나니 남편이 내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변화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고 무엇보다 나의 언어를 자식이 그대로 흡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아이를 향한 어른의 비교는 필요 이상의 경쟁의식과 시기로 밝은 눈을 어둡게 만든다.

서로를 탐구하고 어울리지 못하게 만들어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빠르게 다가오는 AI시대에는 키오스크, 로봇의 다양한 상용화 등 언텍트 문화가 도래하지만 새로운 문화 속 더욱 돋보이게 될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수든 다수든 즐겁게 어우러지는 관계성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인간의 발전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 호기심과 필요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아이 학교 상황으로 한 달 연재를 쉽니다. 양해 감사합니다.

이전 14화 김칫국 혈투, 김장 카르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