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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Apr 17. 2024

여유로울 때 공허함이 밀려와요. (심리상담 편)

기준치를 높게 설정하고 도달하지 못하면 자책하고 방전하기를 반복했습니다.

나 : 여유롭게 쉴 때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이 올라와요.


선생님 : 그런 감정을 느낄만한 계기가 있었나요?

나 : 바깥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저희 집 근처는 원숙하고 멋들어진 나무들이 많아요. 도로 양쪽에 줄 지은 가로수 줄기와 수관이 서로 맞닿아 돔을 이룰 만큼 아름답죠. 햇볕의 조도에 따라 매일 다른 연둣빛 그러데이션을 감상할 수 있어 참 행복한 느낌을 받습니다. 바람이 살랑 불어서 나뭇잎들이 날리기라도 하면 영화의 한 장면이에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여유롭게 나뭇잎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던 찰나였어요. 저는 분명히 행복했지만 갑자기 마음이 울렁이면서 깊은 외로움과 공허함이 올라와 눈물이 났어요.


선생님 : 그랬군요. 자연을 느끼고 예뻐하는 풍부한 감성이 참으로 값지네요. 

평소에도 외롭고 공허한 감정이 자주 올라왔나요?


나 : 저의 관찰력과 감수성이 디자인, 글, 그림, 예술문화를 누리는데 필요한 감각이라 그런 제가 좋습니다. 외로움은 누구나 오고 가는 자잘한 감정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지만 출산 후부터 시작된 큰 산 같은 '인생 자체의 근원적인 고독'이 요즘 더욱 느껴집니다. 인생은 호르몬의 장난이란 재밌는 말도 있잖아요? 근래 들어서는 단전부터 올라오는 압도적인 '공허함'에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본래 외향성향도 다분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취미활동을 꾸리며 살아왔어요. 심심과 지루 라는 단어 뜻이 가물가물하게 싶게요.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는데도 취미활동도 생산적으로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직업 특성상 인사동이나 핫플레이스를 방문해 방문해 디자인 편집숍, 프리마켓 등을 살펴보고 새로운 아이템들을 접하기를 좋아했고요. 현재는 토끼 같은 딸들과 다정한 남편이 있고 내가 원하던 가정을 이루었는데 이 시점에 이런 마음이 드는 스스로가 이해가 안 돼요. 일이 몰아치게 바쁠 때는 모르다가 한 템포 쉬니 이런 사단이 일어나고 있네요.

나 같은 사람도 공허함이 온다고? 스스로에게 놀라면서요.

 

 


선생님 : 그런 마음을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나요?

나 : 네, 친구들에게도 이따금씩 이야기하기 시작했고요. 특히나 같은 육아하는 상황에 놓인 아이 친구 엄마들하고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찰떡같은 감정을 공유하기도 해요. 남편에게 이야기할 때면 성심껏 들어줘서 그때만큼은 마음이 풀리고 고맙게 생각해요. 삶에 방해가 될까 봐 자주 이야기 하진 못해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저의 문제라고도 생각하고요.


선생님 : 주변사람들이나 남편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좋습니다.

어린 시절 여유를 누릴 때 겪었던 부모님과의 어떠한 경험들이 있을까요?


나 : 음... 글쎄요. (한참 후) 떠오르는 일들이 있어요. 어머니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어요. 길을 가다 관찰하고 싶은 무언가를 마주할 때 걸음을 멈추면 어머니는 얼른 가자고 재촉하셨어요. 밖에 어린이집 버스 왔다고 달달 볶임을 당하다가 버스가 가 버리면 버스를 못 탄 탓을 제가 혹독하게 짊어진 기억도 선명하고요. 아빠의 화와 재촉하는 분위기로 이어진 위축된 마음도 그대로 유지된 채  어린이집에서도 하루를 보냈어요.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하니가 그럼에도 부모에게 웃음을 보이는 연약한 존재잖아요. 부모는 계속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버지 또한 저와 남동생에게 명령을 내리면 재깍재깍 일을 수행해야 했고 언제나 긴장감 속에 살았어요.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반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훈육방식 속에서 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어요. 모든 제게 부여된 책임들은 외적 압력으로만 이루어진 의무들 뿐이었죠. 수준과 역량을 벗어난 책임감이 부여되고 수행함에 있어 인정과 칭찬을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어요. 성인이 돼서도 제게 주어지는 일들이 만사 귀찮고 힘겹게만 느껴졌던 증상은 무기력증의 초입 혹은 겉으론 잘 드러나지 않는 중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찜질방에 가도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 편하게 있어본 적이 별로 없어요. 몸은 찜질방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했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걱정, 후회를 습관적으로 말씀하셨죠. 세상에 모든 후회거리를 모조리 수집하여 내게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네가 대신 내 몫까지 완벽하게 행하라는 메시지로 다가왔죠. 찜질방과 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저는 친구들과 찜질방을 와서도 무의식에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이 불안해하는 아버지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재촉했지만 어머니 역시 성격 상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행동파예요. 집을 청소하거나 언제나 바삐 움직이는 어머니는 괴로웠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종합적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부리는 것을 최악 시 했어요. 그리고 그것이 자녀를 위한 일들이라고 착각하셨죠. 


선생님 : 힘들었을 마음이 안타깝네요. 여유를 느낄 때 공허함 외에 드는 기분이 또 있나요?

나 : 때때로 여유로움을 느끼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 죄책감이 들어요. 분명 저는 주양육자로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엄마이면서 재택근무로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 외 벌여 놓은 일들도 기준치를 높게 설정해 놓고 도달하지 못하면 자책하고 방전하기를 반복합니다. 


선생님 :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팔자예요.(웃음)

나 : 하하하~ 그러네요. 


선생님 : 여유 있는 마음은 훌륭한 마음이에요.

나 : 맞아요. 저는 원래 한 가지 일을 수행할 때 여유를 갖고 오랜 시간 골똘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쌓인 다양한 경험들 속에 가치와 지혜들을 융합하는 데서 흥미를 느껴요. 저를 잘 관찰하셨던 선생님과 교수님은 제게 잠재력있는 대기만성형이라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교수님들은 저를 따로 많이 부르기도 하셨고 저도 또한 많이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현재는 저만의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는데도 워낙 깔끔하신 친정어머니가 저희 집에 오시면 성인인 딸의 부엌살림을 들추어 일일이 간섭했어요. 방을 닦고 나서 반짝반짝해진 바닥에 몸에 비추곤 하셨다던 외할머니의 높은 청소력이 기준이었어요. 둘째가 아직 6개월밖에 안되어 체력이 남아나질 않던 상황인데도요. 자존심 상하고 무례한 일이에요. 다정한 말로 함께 도와주셨거나 돕지 못할 바에 아예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상황 그 자체로서도 마음 뜨겁게 감사했을 겁니다. 부모님은 저란 사람을 아직도 모릅니다.


최근 들어서는 경제상황을 간섭하면서 저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건건이 캐물었고요.

돈 버는데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하지 않느냐 압박했습니다. 모녀에게 주어지는 평범하고 안락한 통화는 존재할 수 없고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취조만이 있을 뿐입니다. 엄마는 자신이 물건을 얼마나 싸게 샀고 얼마를 절약했고 얼마를 투자했는지 제게 정보를 실어 날랐고요. 엄마와 돈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고 하면 주부가 살림을 하는데 시세와 물가를 파악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도 못하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시죠. 어린 시절부터 제게 ‘너는 정말 유별나고 예민하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제가 느끼는 서운한 감정을 이야기하면 엄마는 듣고 계시지만 알겠다고 긍정하는 척하면서 뒤에 붙이는 말들은 언제나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설명을 하거나 묵묵부답이었어요. 좋은 이야기라도 계속 이야기하면 질리는 법이잖아요. 더군다나 상대가 계속해서 싫다고 하면 안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평생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값을 갱신시키면서 돈의 노예로 바쁘게만 살다가 돌아가시면 억울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건네봤습니다. 


저는 경제상황으로 잔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처럼 알뜰살뜰하게 저축하는 사람도 없어요. 첫 직장 때부터 월급의 7~80프로를 저축하며 살아왔어요. 월급날이 특별히 기쁘지도 않았고 특별히 많이 쓰는 날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어요. 자신에 대한 투자나 필요한 여행도 챙겨서 했고요. 나라에서 제공하는 교육도 틈틈이 챙겨 공부했습니다. 소액이라도 제 상황에 맞춰 비영리 구호단체에 매달 납입도 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치며 저축하는 사람을 저는 못 봤습니다. 여유를 느낄 수 있는 때에 온전한 쉼을 누리지 못하고 곧바로 채찍질당하는 노예 마인드가 장착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이런 뙤약볕에 따뜻할 자격이 있나 죄책감과 공허함이 몰려와요.


돈은 필요한 것이고 추구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돈에 대한 저의 인식이 지긋지긋해져서 남편한테 경제권을 넘겨버리고 용돈 받은 지도 오래예요. 모든 지 오케이 하는 남편 덕에 가계에 구멍 난 적도 많지만 다시 경제권을 가져 올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다시 가져오게 된다면 저축 액수가 훨씬 커질 거라는 생각에는 부부가 이견이 없지만요. 어떻게 보면 어머니를 대항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아직도 엄마와 나의 가정을 분리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생각해 보니 공허함에 눈물이 났던 그날 엄마와 통화를 했던 날이기도 해요. 엄마와 통화를 마치면 언제나 마음이 불편해지고 ‘세상에 부러워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단다. 그렇게 여유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라는 의도가 통화 내용에 교묘하게 들어가 있어요. 기껏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놓으면 통화 한 번으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통화하지 않으려고 해요. 저도 사람이라 어디론가 발산이 될 텐데 아직 어린 제 아이에게 영향이 가요. 여유와 공허라는 주제로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담을 나누면서 정말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네요. 말씀드리면서 동시에 스스에 대해 깨닫게 되는 사실들이 참 많네요.


선생님 : 혹독한 시절과 일들을 겪었군요. 그럼에도 그 안에서 잘 살아내고자 했던 애씀과 수고가 느껴져요.

나 :  등원할 때 여유 부리지 못해도 하원할 때면 아이들과 길을 걸으며 보고 싶은 걸 보도록 오래 기다려주려고 해요. 4세면 제 눈에는 아직도 아기 같은데 어린이집을 다니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좀 늦더라도 재촉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첫째 아이는 민감성이 높아서 눈치를 보는 모습이 안타까워 상냥하게 대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제 마음속에 숨겨진 못마땅함을 캐치하고 있을 녀석이에요.


선생님 : 잔디님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재촉하셨다는 그때, 목적지로 향하고자 했던 어머니의 말은 옳은 거예요. 방향성을 둔 재촉’과 ‘재촉을 하며 쏟는 비난’이 분리돼야 해요. 재촉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엄마의 말투를 파악하고 눈치 보는 연습도 해야 사회에 나가서도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어요. 과도한 눈치가 아니라면 눈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한 겁니다.

나 : 아... 재촉은 곧 나쁜 것. 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면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요?

 

 

선생님 : 자, 아이 역할이 되어 한번 말해보세요.

나 : "엄마, 여기 거미줄 좀 봐. 멋지지~ 담벼락 구멍에 집을 만들어 놨어."


선생님 : "응~ 거미줄 구경하는 거야? 집이 근사하네. 거미는 어디로 갔나?

우리 거미줄 조금만 구경하고 가자^^ 아빠가 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대~."


나 : 아, 듣고 나면 정말 쉽고 편안한 대화가 있다는 걸 깨닫네요. 누구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대화가 제겐 왜 쉽지 않게 느껴질까요. 마음 속에 여유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버리고 당당한 마음으로 훈육하고 싶어요. 상담 주제로 말씀 안 드렸으면 어쩔 뻔했을까요. 



 

상담을 따끈따끈하게 마치고 바로 나오면 자연이 주는 햇살이 온전히 내가 누려도 되는 나의 것으로 느껴진다. 별 감정 아니라고 치부하고 다른 주제를 꺼내려고 했는데 안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상담하며 잊고 있었던 과거의 감정을 꺼내 해석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머물고 있었던 마음으로부터 점점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어른들에 의지할 수 없는 외로움과 ‘나’라는 의지는 무시된 채 어디론가 바삐 움직여야 하는 내면이 뻥 뚫린 나는 어른이 되어 내 마음을 두드렸다. 그럴수록 더 강해지라고 몰아치기에 앞서 지금 내게 필요한 처방은 바쁘거나 바쁘지 않은 나의 모든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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