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아저씨는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 멱살을 잡고 나가 내동댕이 쳤다.
지하철에서 아저씨들끼리 말다툼이 일어나 관심이 집중됐다.
서서 가던 60살쯤 다 돼 보이는 아저씨가 앞에 앉아 있던 40대 아저씨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추측해보니 60살 나이 든 아저씨가 앞에 앉아 가던 아가씨를 불편하게 했는데 옆에 앉아있던 40대 젊은 아저씨가 말로 거들고 도와줬나 보다. 나이 든 아저씨는 억울한 기색으로 젊은 아저씨에게 네가 뭔데 끼어드냐고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목이 집중된 젊은 아저씨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오해해서 죄송하다는 나즈막한 말로 무마시키려는 듯 보였다. 사과에도 분이 안 풀린 나이 든 아저씨는 점점 언성이 높아져갔다.
"당신이 봤어? 내가 그러는 거 봤어?!"
"아,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나이 든 아저씨가 무례했고 진위파악도 안 되어 보였다. 그런데도 젊은 아저씨는 상황을 회피하려고만 했고 보는 내내 답답했다. 만만하게 여겨도 되겠다 싶은 나이 든 아저씨는 젊은 아저씨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그럼에도 젊은 남자는 얼굴만 새빨게진 채 가만히 있었다.
"네..죄송합니다."
아오, 가마니 쓰니 가마니로 보나.
간을 보니 더 해도 되겠다 싶었는지 이번에는 젊은 아저씨의 머리 정수리를 때렸다.
계속된 갈굼에도 젊은 아저씨는 당황해 하기만 했다.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면 차라리 이러저러해서 오해하게 되어 미안하든지 아니면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든지. 변명조차 않고 왜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만 반복하고 있는 걸까.
얼마 후, 지하철역이 역에 정차했고 곧 출입문이 닫힌다는 안내 메시지와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젊은 남자는 문이 닫히기 직전 벌떡 일어나서 아저씨의 멱살을 잡고 순식간에 문밖으로 끌고나가 내동댕이쳤다. 출입문은 바로 닫혔고 젊은 남자는 나이 든 아저씨를 주먹과 발로 폭행했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거리며 유리창 밖에서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지하철이 출발하면서 그들은 이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가 먼저 손을 댔든 폭력은 잘못됐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내 속이 뻥 뚫렸다.
대중들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젊은 남자의 편을 드는 탄식을 내뱉었다. 가만있으면 가마니로 보는구나.
그러데 말이다. 왜 가만히 앉아서 가마니를 쓰고 있었을까. 미연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작은 제스처라도 취했으면 어땠을까.
이 남자는 언제부터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는 자 앞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을까.
불합리한 상황을 제공하는 타인에게 왜 자신이 죄송해야 했을까.
저들은 일면식도 없었지만 유교문화 속 서열주의 사회 속 부당한 상하관계였다.
존경은 부재한 채 억압과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앞의 취약한 나였다.
변명은 필요 없고 까라면 까는 군대 속 고참과 초년병이었다.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내 정치 속 직장 상사와 직원이었다.
날아차기 발로 배를 걷어찼던 내 초등학교 시절 남자 담임 선생님과 취약한 우리 반 남학생이었다.
내 아이를 때렸다고 교무실로 달려 와 깨진 유리를 던진 한 어머니와 조용히 무마해야 했던 우리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내가 취약했던 때 '나'를 지킬 수 없었던 우리 사회는 모두가 단단히 억울하고 화가 나 있다.
애초에 수평관계는 개나 줘버린 상황에서 상하와 갑을 관계가 계속해서 뒤바뀌는데도 상위를 차지하기만 하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른다. 이는 내일도 미래도 없고 오늘만 사는 병든 사회 모습이다.
얼마 전 미국 유명 작가 마크 맨슨이 한국 사회의 정곡을 찌른 듯한 언급으로 뉴스에 화재였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면서 청년 뿐 아니라 노인 자살율이 1위로 치닫고 있는 한국이 유교의 나쁜 면인 수치심은 남기고 지역 사회와 가족 관계의 친밀함은 버린 것 같다고 했다. 우울한 영혼으로 죽어간 그들은 처음엔 아이였고 초년병이었고 담임선생님이었고 또 자신의 아이를 위한다는 손에 독을 쥔 어머니였다.
또한 작가는 이렇게 언급 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할 수록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가족중심, 끊임없는 남들의 평가와 체면, 성과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은 한국 사회는 '자기표현능력'과 '개인주의'는 무시했다. 우울증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공감이 아닌 인격의 실격으로 여겼고 드러내지 않고 묻어버리고 싶어 하는 점이 말도 안되게 우울증 진단율이 낮은 이유라고 했다. 우울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게으른 똥이라 여기고 전체 우울증의 7퍼센트만 도움을 요청한다고 했다. 하지만 작가는 희망도 예견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지금껏 그러했듯 한국 특유의 회복력을 언급하면서 사회의 깊은 우울증 회복을 위해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 봐야할 때라고 했다. 이것이 한국의 새로운 도전과제라고 했다.
우리는 병이 깊어 입원한 환자에게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 하라며 일어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마음에 병이 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달리기를 멈추고 ‘나’를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때 그때 내 안의 소리를 들어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