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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May 02. 2024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르는 근본 원인

나의 시간을 내어주고 있음에도 좋아한다고 믿지 못했던 근본 원인

사람들은 내게 재능이 있어서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

디자인 하고 그림 그리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주 듣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켠에는 나의 일에 대한 의심이 컸다.

관심을 주고 내 시간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사랑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확신'의 부재였다.

지금에 와서 과거를 돌아보면 인간으로서 탐색과 방황의 시기는 당연한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듣도 보도 못한 과정을 맞이한 당황함과 괴로움으로 보낸 세월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1년 전 쯤이었을 것이다.

우리집에 놀러오신 할머니는 주무시기 전 내 침대에 기대앉아 많은 의미가 내포된 질문을 하셨다.

내게서 대답을 들으신 할머니는 어떠한 확신과 안심의 눈길을 돋보기 너머 책으로 다시 돌리셨다.


"디자인은 기술이니까?!"

"그럼요. 할머니."


한 때는 잘 하는 일 vs 좋아하는 일 중 뭘 택해야 하나 제한적 질문에 답을 고민하기도 했다.

잘 하는 일을 하며 잘 살고 있는데도 오랜 나의 꿈을 잊고 사는건 아닐까 싶었고 혹은 재능에 확신이 없는데 언젠가 이룩 될 꿈을 이루겠다고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건 아닌가 싶었다.

어느 쪽이든 '나'라는 존재는 없는 죄책감으로 귀결되었다.


드라마 <미생>을 쓴 윤태호작가는 잘하는 일 vs 좋아하는 일 둘 중 어떤 선택을 해야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받고는 하는데 이렇게 대답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해서 잘하는 경지까지 끌어올리게 되는 경우, 이 질문 자체가 의미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잠깐 그것을 해결하고 다시 이어나가면 된다고 했다.


여기서 답답한 건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 맞는지 확신이 안 들거나 관심 범위에 있더라도 계속 세분화 되는 영역 앞에 주춤하는 경우다. 어떤 분야라도 경력이 적은 사회초년 시절엔 힘에 부칠 때가 많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내 의지로 시도해 볼 수 없었던 수만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직업군에 관심을 보이면 엄마는 언제나 반대되는 의견을 슬쩍 슬쩍 던졌고 내게서 모든 불안요소를 완벽히 제거했는지 확인하려 했다. 


"엄마, 농구가 무척 재밌어 보여. 농구선수 되고 싶다."

"에휴~ 농구는 키가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는거야."


"노래를 정말 감미롭게 잘한다. 저런 가수가 되고 싶다."

"아휴 노래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가수는 떠야 좋은거지. 안정적이지 못해."


어린 시절의 꿈은 자주 바뀌게 마련이다. 유치원 시절에는 대통령에서 병원놀이를 하며 의사로, 간호사에서 소방관으로, 경찰관에서 환경미화원으로, 내적 동기에 의한 세상의 관심으로 지식을 확장시켜간다. 그런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전에 엄마는 은근슬쩍 흘리는 말들로 관심을 차단했다. 각잡고 앉아 농구의 룰을 익히고 경기를 즐길 단 한번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가 관심갖는 분야가 무엇인지 엄마는 내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었고 그 길을 위하여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엄마와 대화 나눠본 적도 없었다. 신뢰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면서도 동시에 딸이 원하는 길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한가지 영역에 대해 깊게 파고들어 본 사람은 다른 영역도 전문적으로 파고 들 수 있는 근력이 생긴다. 엄마는 딸이 쏘는 활이 정확한 표적에 적중하는 완벽한 선택이길 바랐고 혹여나 실수했다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풍비박산 날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결코 강요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왜곡된 정보는 나의 무의식을 점령했다. 네가 좋아하는 관심은 언젠가,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지금 당장 해야 하는 보기 싫은 교과서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또한 같은 책이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 또한 통제받았다.

아이들은 반복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고 지식을 내재화 하며 세상을 이해한다. 아는 답일지라도 부모의 같은 대답을 통해서도 안정을 느낀다. 너무 질문이 많으면 세상을 이해하고 싶고 안정을 추구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부모님은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면 자녀를 잘 키운다고 생각했다. 그건 부모님 자신들의 불안이었다. 엄마는 동네에서 부잣집으로 소문 난 선비 집안의 막내딸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나의 외할아버지 중풍과 돈을 관리하던 계주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맞이한 고통을 극복해 낸 종갓집 맏며느리자 장녀였던 나의 외할머니를 본 엄마의 불안이었다.


부모세대에는 하던 일도 그만두고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좋은 가치관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살았다.

반면 자녀를 키울 때는 딸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워너비 이미지로 상품화 되기 시작했다. 자녀가 결혼을 해서는 살림도 척척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면서도 커리어우먼으로서도 성공하여 자신을 대우하길 바랐다. 엄마의 바람은 곧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슈퍼우먼의 원형이었다.

다양한 종족으로 이름 붙여진 외계세계처럼 딩크족, 캥거루족, 끝없는 도파민 충족을 요구하는 물질주의 시대에 출산도 포기한 MZ 세대는 잘못이 없다. 출산율 저하는 십수년 전부터 큰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그 때 당시 10대 안팎 청소년들이 지금의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 원인 제공자일 리 없다. 사회분위기를 결정짓는 여론 조차 나와 다른 집단에 대해 상대를 비하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가 담긴 방식으로 종족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복잡하고 골치아픈 문제들을 은근슬쩍 패키지에 포함시켜 탓을 돌리기 쉬웠다. 책을 읽고 사색 할 시간도 사랑의 자원도 없던 부모세대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 자녀들을 몰아부치지 않으면 너와 너의 자녀들도 비주류 종족으로 전락시켜 마녀사냥 당할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다양성을 존중하자고 머리로 말을 하면서 가슴으로는 한 민족이 아니면 연구대상이라는 듯한 태도는 진지충, 설명충, 맘충 등 성별과 연령을 갈라치기 하는 온갖 벌레가 사는 대한민국으로 확대되었다. 좋은 버릇을 들이는 데는 오래 걸리는 반면 나쁜 버릇은 알아서 빨리도 배운다. 


여러 예능프로그램을 성공시킨 나영석 PD가 다른 PD들과 함께 송길영 박사를 초빙해 미래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시청했다. 세상의 영역은 넓은 범위에서 좁게 분화되어지고 성공과 극복이 있는 '개인의 서사'가 각광받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기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컨텐트를 찾는 일부터가 시작이라는 메시지였다. 강의 끝 질의응답 시간에 한 PD가 질문을 했다. 나만의 컨텐츠를 만드려면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뭘 좋아하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자기 객관화가 매우 어렵다고 토로했다. 송길영 박사는 나를 알기 위해선 '자아성찰'이라는 매우 어려운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취결과값을 목표로 한 행위 보다 '내가 어떤 장르르 좋아해서' 그것을 하는 '나의 행위가 좋은 것'을 찾아야 하고 관심사는 점점 '나'라는 개인으로 좁혀질거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탐색과 방황의 시기'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이 시기는 나이가 들어도 계속 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많은 업적을 이룬 나영석PD 사단에 소속된 그 PD 마저도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듣고 보니 나의 경험 상으로도 '나'를 탐구하는 교육과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세계적으로도 자주성이 높은 대한민국에서 그런 교육이 빠졌다니 의아할 뿐이다. 


문화번영을 앞서 경험했던 해외 선진국들은 사회적 비용을 치루며 당장의 성과보다 나에 대하여 잘 알고 나의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잘 표현할 줄 아는 학생이 사회에 나가 성공하고 번영을 이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선 내 인생을 순수한 의지와 욕망으로 펼쳐보고 농부의 마음으로 눈물 기쁨 실망 믿음으로 성장시킨 서사가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내가 관심을 주고 있는, 나의 시간을 내어주고 있는 분야를 내가 좋아한다는 믿음이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

나의 히스토리가 없는 완벽한 직업군은 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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