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기준은 나에겐 오답일지도 모르고.
사주를 보러 간다거나 철학관 오너를 생각하면, 수염과 흰머리에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연상된다.
이런 곳에 잘못 가면 남자는 사회활동, 여자는 현모양처(사주풀이에서는 남자는 관. 여자는 재성과 비슷한 뉘앙스)
ㅉㅉㅉ 남편 잡아먹을 사주로다~ 이 팔자 글러먹었어~ 라는 악담을 들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릴 때 들었던 최악의 상담은 기생팔자라 잘 안 풀리면 술집 접대부가 된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 사주를 공부하고 추론해 보니 십이운성 거법으로 풀이하면 목욕지 2개와 상관, 도화가 함께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기생(술집 접대부)이 되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미술을 하고 디자인전공으로 학/석사를 마치고, 대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재직하고 있다.
전통적 관법에서 보면 예능에 뛰어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기생밖에 없었겠지만 현대에 와서 얼마나 많은 분야에 능력을 펼칠 수 있는지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도 고전의 관법으로 풀이를 하니 올바른 상담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
세상의 가치기준은 변했고 지금 시대에 맞는 상담풀이가 필요하다.
과거, 여자의 역할은 남편이 극해서 취하는 재물과 같은 수동적인 존재로 여겼다. 처첩의복(처와 첩은 내가 가지는 옷과 같다는 말) 같은 소유물로 여겼다.
그 시절 남자의 관은 조직과 권력이고 남자에게 재성은 아내와 재산이었다. 반면 여성에게 관은 남편이었다.
이런 구분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이론이 되었다.
현대적 관법에 남녀는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가 서로의 재성이 되고 여성에게도 관이 남편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는 '조직'이 된다.
명리를 공부하기 전의 나는 고릿적 시절의 남녀에 대한 편파적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철학관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명리상담실을 오픈을 하게 된다면,
고전중심 통변을 하는 철학관이 아니라 라이프 컨설팅(Life consulting)을 하고 싶다.
철학관이라는 이름이 주는 편견과 한계를 극복하기보다는 포지셔닝을 바꿔버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결국 철학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삶의 방향성에 대해 컨설팅을 받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길을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을 답습하는 명리와는 다른 현시대를 반영하여 개편된 관법의 접근이 필요하다.
나는 제대로된 상담을 받아보고 싶었다.
고대 관점으로 여성의 삶을 제대로 통변 하지 못하는 상담이 아닌 현대적 관법으로 명리 상담을 하시는 분을 찾고 싶었다.
그런 상담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지만 세상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몇 천년 간 이어져 온 이 학문은 쉽게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기가 어려웠다.
디자인 같은 최신 학문은 시대를 반영하여 변하는 것(리뉴얼/리포지셔닝)이 당연하지만, 명리 같은 고전학문은 시대마다 변화를 적용하는 건 학문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여겼을 거다.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진리 같은 학문이라고 해야 더욱 믿음이 갈 테니까.
명리가 경전처럼 신의 말씀이 되고 싶었던 걸까?
명리는 그저 인간사를 다룬 실용학문일 뿐인데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 학문의 가치가 뒤처지는 것이 된다.
명리학문의 현대화는 단 한명이 아니라 수많은 명리학자들이 이루어나가야할 숙제라 생각한다.
기존의 학문을 고쳐서 업그레이드하는 역할을 하는 시대를 꿰뚫는 개척자이자,
넓은 학문적인 견해를 가지고 인간을 사랑하는 인본주의적 그릇,
동시에 부지런히 학문의 개정과 개혁에 기여할 인내심 있고 학자적인 자세를 동시에 가진 선인이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아직까지는 많은 현대적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다.
보수보다 진보, 주류보다 비주류적인 것에 주로 마음이 끌려 나는 혁신적인 현대파적 명리선생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딱 맞는 좌파적 변혁을 꿈꾸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배움을 시작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도반을 만나 함께 공부하며 저변을 넓혀가면 이 학문의 업그레이드와 현대적 실용성이 더욱 보편화 되리라 생각한다.
사주팔자의 근간은 변하지 않지만 시대의 기준과 가치에 따라 새로운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컵에 담긴 물을 보면,
과거 바가지에 담긴 물도 물이었다.
현재 유리컵에 담긴 물도 본질적으로 과거의 물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바뀌게 되었고, 본질은 그대로지만 그 그릇의 모양에 맞춘 이해와 적용이 필요하게 되었다.
명리도 현대식 관점과 오늘날의 가치기준을 반영하여 사주팔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적합하다.
사주팔자를 담은 명리학은 그 시대를 바탕으로 둔 인간사를 이해하는 학문으로 이해하면 좋다. 그러니까 과거의 기준은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린(다른) 결과를 갖고 온다.
사주는 명식 안에 희로애락, 부귀영화, 생로병사 같은 우리의 삶의 흐름이 있을 뿐이며,
서열을 나누고 현실과 동 떨어지는 족집게식의 맞추기 혹은 남존여비 같은 편견 가득한 이야기가 아니다.
명리라는 학문은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전제왕권과 귀족주의적 통치 이념이 아니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개별에 맞춘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팔자대로 산다고 한다.
명리를 공부하고 있지만, 세속과 떨어져 도를 닦으며 청아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 외부 기준에 맞춰 평가받고 난도질 당해, 자기 아이덴티티를 뜯어고치는 게 사주팔자 풀이가 아니라는 거다.
내 사주는 화려함이 돋보이며 사치스러운 을사일주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 과정에 미움을 받고 나댄다는 악평은 어쩔수 없을거다.
일지가 목욕 상관이면 배우자와의 인연이 박하다는 고전의 풀이가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 목욕에 상관이면 배우자의 구속 없이 독립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편과 인연이 박하다는 의미란 대체 뭘까?
남편에게 모든 경제적 생존과 사회적 보호를 의존했던 과거에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여자 혼자서도 많은 권리와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현대적 해석으로 남편 인연이 박한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 되어 오히려 부부사이가 좋다.
서로에게 필요한 조언을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공유하며, 삶에 필요한 깊고 건설적인 대화를 함에 있어 최적의 소울메이트다.
부부는 하나라는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이가 나쁜기는 커녕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사이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고 함께 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다.
과거 관점에서 보면 부부가 한 몸으로 움직이지 않고 각자도생, 개인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사는 거면 망조...??말아먹은 가족풍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서 남편과 묶이지 않고 독립적 삶이 보장된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기회와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21C 일지 상관 여성으로서 많은 성취를 하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고전 관법의 명리상담을 갔다면 남편과 인연이 박하며, 남편을 잡아먹거나 평생 고란살에 외롭고 목욕지에 있어 음란하고 사치가 심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의 모습은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는 사회여성이 되어, 디자이너로써 화려한 표현력으로 내 기운을 재능적으로 잘 풀어내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기운을 나의 활동과 사회에 풀어내지 못했던 과거라면 상관 목욕지 여성은 남편을 잡고 음란, 호색, 사치에 빠져있겠지만 21세기의 나는 남편을 잡아먹을 열정과 에너지를 나의 사회적 성취로 치환했다.
(바빠서 남편 잡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명품을 좋아하는 사치로 표현되는 소비 생활 역시 나의 일과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경험 투자가 되기도 한다.
사치와 럭셔리를 모르는 검소한 디자이너가 만든 평범한 상품이 시장성이 있을까.
극도의 절제와 미니멀 역시 극단의 럭셔리에서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이다. 최고급을 모르면 커머셜도 매스 디자인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
자식을 낳으면 남편과 멀어진다는 상관 여성이란 운명은,
출산이 필수였던 과거에 부정적으로 작용했겠지만 현대사회에는 자녀 없이 배우자와 둘이서 친구이자 인생 파트너로서 동등하게 즐기며 잘 살아갈 수도 있다.
세상이 다원화되었다. 얼마든지 다채로운 선택이 가능하고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어 즐겁게 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
과거처럼 정형화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는 다양한 활동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자유의 시대가 됐다.
남편대신 자식에 온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야 만족해야 했던 과거의 상관 여성은, 이제 이 현대 사회에서 남편과 자식에 기대어 대리만족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를 가꾸어서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2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어쩌면 전업주부로 명리에 쓰인 괴로운 상관 여성의 운명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등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지지하는 연하 배우자를 만나 많은 것들을 도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내가 무엇을 못 가진다면 그건 배우자의 간섭이나 사회 혹은 가정의 제약이 아니라 스스로가 게으르거나 포기하는 경우 밖에 없다.
해답은 내 우주 속에 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내 삶은 오답투성이 엉망진창 일지도 모른다.
내 기준에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가정의 모습은 부모세대 그 윗세대들이 보면 기함할 형태의 모습이다.
세상 기준에서 오답으로 보인들 어떤가? 내 기준에서는 만족스러운 모습 그 자체다.
반대로 세상 기준으로 완벽한 현모양처에 성공한 남편을 보필하는 정경부인 팔자... 21세기 한쪽의 희생만 강요된 그 가정은 행복할까?
남편을 관으로 여기며 일방적인 희생이 요구되는 재성의 역할만 해야 하는 여성이 행복을 느끼기에, 요즘 세상에는 너무 많은 기회와 자유가 있다.
자기 사주의 아이덴티티를 모르고 무조건 현모양처가 된 여성은 친한 친구, 옆집 언니와 비교해서 슬프고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질수도 있다.
현대 여성은 조선시대처럼 담벼락 안에 갖혀 세상 소식에 무지몽매하지 않다.
세상은 변했다.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면 내 우주 속에는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남들 보기 부족할 거 없이 보여도 스스로는 ‘이게 맞아?’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명리학 공부는 고리타분한 윗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오늘의 관점에서 명리를 공부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절제나 중도가 없는 소비 생활을 하며, 명리학이라는 학문을 내 삶의 그릇으로 담아 이해하는 중이다.
‘오늘의 명리’는 현업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회생활 속 실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세속적인 일상에서 나는 어떤 명리적인 철학을 운용할 수 있는지. 세상 보편적인 정답이 아니라 내 우주 속의 해답을 찾아내는 것으로 명리의 기준이 변해야한다.
사회의 기준이 아닌 개인의 기준이 중요해진 세상이다.
(그래서 퉁변에서 시주가 가치가 더욱 급부상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대학을 갈 필요는 없다.
자기 우주 속에 가진 기운과 방향을 이해하는 것이 세상이 제시한 기준에 맞추는 것보다 쉽고 빠르고 만족도도 높다.
각자의 정답은 다르다.
내 우주의 해답은 세상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