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임 Jun 03. 2024

[글감 복지 에세이] 프롤로그

상쾌함의 머리와 쓸쓸함의 꼬리

차가운 바람이 내 빰을 스쳐다.


그 차가움은 마트의 냉장코너 옆.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옆은 아니고.

냉장코너에서 한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걸을 때 손끝을 스쳐가는 그 차가움. 딱 그만큼의 차가움이다.

그냥 차갑기만 한 건 아니다. 

그 바람에는 향기가 있다.

백화점 정문을 열고 1층 화장품 코너를 천천히 걷다가 후문으로 나온 누군가의 그 향긋한 체취처럼, 나를 스쳐간 바람은 들판의 나뭇잎 코너 뒷문을 막 지나온 향이 난다.

싱그러운 자연의 체취를 온몸에 묻힌 체 차가운 몸짓으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이 바람의 이름은 상쾌함이다.


나는 이 녀석을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다.

11월 초 육군 훈련소의 흙바닥에서.

10월의 어느 날 밴쿠버의 아침.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전철역으로 향하던 그 길에서.

이미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아니야. 잘될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속여가며 힘겨운 걸음으로 마주했던 마음의 길목에서.

이 바람의 이름은 쓸쓸함이다.

상쾌함의 머리와 쓸쓸함의 꼬리를 가진 그 바람.


그 바람과 재회할 때마다 나는 언젠가 그의 이야기를 글로 남길 거라고 약속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이 녀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었다.

그 녀석에게 형체를 주고 싶었다.

우리의 세상으로 녀석을 꺼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녀석과 만난 지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아직 그 녀석에게 몸을 주지 못했다.

녀석에게 온전한 형태의 몸을 주기엔 내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몸을 주기엔 기승전결이 부족했고, 에세이 속에 넣기엔 너무 파편적이었다.



내 생각의 들판에는 이런 녀석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하나의 주제로 정제하기엔 어딘가 부족함이 많은 녀석들.

과거의 어떤 장소에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흐릿한 감성의 안갯속에서. 그들은 주인 잃은 유기견처럼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녀석들을 내 안으로 데려왔고 씻기고 뭉친 털을 깎아줬다. 

그리고 언젠간 다시 너희들의 모습으로 세상에 소개할 거라고 약속했다.  

녀석들은 언젠가 다시 세상밖으로 나갈 날만을 기다리며 내 안의 작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녀석들을 기다리게만 할 수는 없다.

일단 세상의 빛을 보게 하자.


그런 취지로 '글감 복지 에세이'를 기획했다.

브런치북의 소개에도 언급했듯이 녀석들에게 통일성은 없다.

하나의 주제로 묶기에는 각자의 개성이 너무 다양하다.

나는 녀석들의 완벽한 성장을 위해 항생제를 투여하거나 특정한 형태로 정제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생각의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던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내어놓으려고 한다.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뛰어놀다가 세상으로 나오는 동물복지인증 상품처럼.


낯을 많이 가리는 녀석들을 위해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