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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Jun 24. 2024

여름엔 나뭇잎을 보세요

화려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 소소한 아름다움이 빛났다.


내가 우리 동네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가로수 길이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7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처음 20초는 아파트 단지의 큰 나무들, 5분은 주거지와 학교 상가들이 줄지어 있고, 나머지 2분은 허리가 굉장히 굵은 나무들의 가로수 거리다.

나무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크기와 굵기로 봐선 적어도 몇 십 년은 그 자리에 있었던 거 같다. 내가 아주 꼬꼬마 시절 버스 타고 그 지역을 지나갈 때도 그 나무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니깐.

크다. 굉장히 크다.

내 키도 큰 편인데 내 키의 두 배는 넘는 거 같다.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땐 꽃 구경, 단풍 구경을 위해 다른 유명한 관광지를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봄에는 윤중로가 부럽지 않은 분홍 벚꽃이. 가을에는 붉은 낙엽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그래서 이 길을 좋아했다.

'좋아했다'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작년에 시에서 '걷기 좋은 산책길 조성'을 위해 그 큰 나무들의 가지를 상당 부분 잘라내 버렸기 때문이다. - 어느 날 아침 큰 나무들의 가지가 잘려나간 나무를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처음으로 구청에 전화해서 민원까지 넣었었다. 다행히도 항의전화 이후에 더 이상 가지를 베지는 않았지만.. 이젠 봄의 벚꽃길도, 시원한 여름의 그늘 길도 모두 사라졌다. -


내가 가장 애정하던 가로수 길.

애정했던 만큼 한동안 그 거리를 지날 때면 실망감과 상실감이 컸다.

괜히 큰 나무들에게 미안했고, 뻥 뚫린 하늘이 원망스러웠고, 탁상행정에 화가 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인걸. 

언젠가 다시 큰 가지를 뻗을 때까지 기다려보는 수밖에 방법은 없다. 

나는 사라진 큰 나무의 하늘 대신, 키 작은 나무들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던 키 작은 나무들은 다행히도 여전히 남아있다

이전엔 키 큰 나무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면, 지금은 매일 아침 키 작은 나무들의 안부를 묻는다.

계절에 따라 형형색색 아름다움을 뽐냈던 큰 나무와는 달리 작은 나무는 사계절 내내 초록색이다.

학창 시절 사생대회 때 그렸던 풍경화에서 아름다운 나무와 나무 사이의 배경을 메우던 초록색 물감처럼.

문득 사계절 내내 변함없는 그 초록색이 평범한 우리 소시민의 모습과 닮아 보여 친근감이 느껴졌다.  



며칠 전 아침.

나는 버스 정류장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뒤에서 들리는 새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내 뒤는 초록색 배경으로 가득했다.

초록색 유선형 모양의 나뭇잎들이 키 작은 나무의 가지 사이를 빽빽하게 채웠고, 그 빽빽한 가지 속에 들어간 작은 새들이 움직이며 서로를 향해 지저귀고 있었다. 

가지 속 새들의 움직임을 추적하면 녀석들이 놀라서 날아갈까 봐 나는 겉의 나뭇잎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남지 않은 키 큰 나무의 가지들이 만든 앙상한 그늘을 제외하고 상당 부분의 잎에는 햇살이 묻어 있었다.

순간 햇살 묻은 그 나뭇잎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연두색에 가까운 밝은 초록색이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뽀샤시 조명 효과로 인한 동안 메이크업인가.


같은 나뭇잎인데 햇살을 받은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은 완전히 다른 색의 물감으로 칠한 것 같았다.

꽃이 아닌 나뭇잎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예상하지 못한 풍경에 넋을 잃으려 할 때 사람들이 바쁘게 내 옆을 지나갔다.

신호등이 나뭇잎 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이날 아침 이후부터 주위에 나뭇잎이 있으면 한번 더 둘러보게 된다. 

짙은 초록색과 연한 연두색의 향연.


특히 바람이 불 때 그 모습은 더욱 아름답다.

뽀샤시 조명 효과를 한쪽만 독차지하지 말라고. 바람이 좌우로 위로 아래로 가지를 흔들어 준다.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오른쪽 나뭇잎이 제일 이뻐 보이다가 왼쪽 나뭇잎이 더 이뻐 보인다.

움직이는 나뭇가지의 부스럭 소리는 마치 '저도 봐주세요. 저도 이뻐요.' 하는 나뭇잎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그래. 인정.

그저 평범하고 흔해빠진 풍경에 불과한 나뭇잎인 줄 알았는데 너희들도 이렇게 예뻤구나.

입 밖으로 말하면 옆사람이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할까 봐 마음속으로 소심하게 대답했다.

봄에 꽃이 있고, 가을에 낙엽이 있다면, 여름엔 너희 나뭇잎들이 가장 아름답다. 인정.

 

화려한 계절의 이벤트가 사라진 자리에 소소한 아름다움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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