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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Jun 17. 2024

내 안의 조명에 따라 당신이 보이고 내가 보인다.

창가에 기대어 문득 깨달은 것들.

기차가 달린다.


여러 개의 몸통을 이어서 달리는 기차.

그중 하나에 내가 있다.

책 보다가 영화 보다가 인터넷 하다가 눈이 뻐근하고 머리가 복잡해서 가만히 창가에 기대어 바깥풍경을 멍하니 바라본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데 창밖의 풍경은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시골의 풍경, 도시의 풍경. 흐르는 강물의 풍경. 혹은 적절히 섞인 장면.

사실 그들은 가만히 있고 내가 탄 열차가 빠르게 달리는 것뿐인데, 기차 안의 나는 그 반대로 느껴졌다.

창밖의 풍경이 마치 지난 삶의 필름 같았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뺐다. 

온전히 바깥풍경과 열차의 소음 그리고 진동에 좀 더 집중해본다.

그렇게 바깥 풍경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이전의 풍경은 사라지고 내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바깥은 온통 까만색으로 뒤덮이고 그 풍경의 자리를 열차 내부의 모습이 대신 채웠다.

터널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검은 바탕 속 주황색과 노란색이 섞인 세상이 보였다.

창문에 비친 나는 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통로 건너 사람은 스마트폰을 뚫어지듯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가 나와 그사람 사이를 지나 열차와 열차사이의 빈 공간으로 걸어갔다.

기차 내부의 모습이다.


만약 밖의 터널 속에 누군가 서있다면 열차 유리창 너머의 이쪽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겠지.

터널을 들어오기 전과는 정반대 상황이다.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것이 보인다.


터널 속으로 들어오기 전엔 기차 내부보다 바깥이 더 밝았다.

세상의 그 무엇도 태양의 밝기를 이기긴 힘들 테니깐.

그래서 나는 밖멍(밖을 보며 멍하니 있는 것)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터널로 들어오면서 유리창엔 실내의 모습이 보였다.

바깥보다 열차 내부가 더 밝았기 때문에 창문은 바깥풍경이 아닌 내부 풍경을 비췄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 안의 조명을 줄이면 상대를 잘 볼 수 있고,

내 안의 조명을 밝히고 상대의 조명을 줄이면 내면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내 안의 조명이란 타인에 대한 편견 혹은 고정관념처럼 고정된 내면의 생각을 의미한다.

타인에 대한 그런 고정된 관념이 크면 상대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지난 경험에 의한 혹은 세상의 기준에 물든 편견이 상대를 제단 한다.

내 안의 불빛이 너무 밝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외부의 조명을 줄여야 한다.

타인의 평가, 세상의 기준, 고정관념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조명을 줄이면 상대적으로 내면의 조명이 밝아진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내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외부의 잡음이 노이즈캔슬링된 내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볼 때나 가능한 일이다.

스마트폰 속에 시선이 묶이면 나의 모습도 타인의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바로 앞의 창에 내가 비쳤는지, 타인이 비쳤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스마트폰 속의 세상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충실하지 못하는 제3의 세계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 단편의 생각이 휘발되기 전에 메모장에 적었다.

바깥 풍경이 다시 밝아지고 유리창에 내 모습이 아닌 바깥풍경이 다시 나타나면 왠지 지금의 생각도 사라질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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