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임 Jul 08. 2024

이별하는 날 사랑니가 나타났다

고통은 또 다른 고통으로 잊혀진다.

더 크게 벌리세요 더. 더.


치과 의자에 반쯤 누워 의사의 지시에 따라 더. 더. 입을 벌려본다.

고기쌈 싸 먹을 땐 한없이 벌어지던 입이 치과에만 오면 왜 이리도 작아지는지.

사실 더 크게 벌릴 수 있지만 최대치가 망설여지는 건, 지난번 치료받으러 왔을 때 너무 크게 벌렸다가 턱이 아팠기 때문이다. 턱을 조금만 더 벌리면 담에 걸린 것처럼 아프고, 그렇다고 입을 조금만 다물어도 의사는 더. 더. 를 외쳤다. 담에 걸리기 직전까지 간 턱의 통증 때문에 치과 치료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이이제이 일까.

통증으로 다른 통증을 제압한다. 턱의 통증으로 이의 통증을 잊게 한다.

치과 의자에 누워 어떻게 하면 턱에 무리가 안 가는 선에서 최대한 입을 크게 벌릴지 고민하던 의식의 흐름은 과거의 또 다른 이이제이를 소환한다. 



그때는 여러 우연스러운 일들이 유난히 자주 벌어지던 시기였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날은 기억나지 않지만 추운 겨울날.

바람이 무척 차가웠던 그날의 나는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여자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그 당시 군에선 '상병 징크스' 같은 게 있었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상병 달면 여친과 이별하고. 그 시기를 무사히 잘 버틴 커플은 제대 후에도 계속 사귄다.

누가 그딴 징크스를 가장 먼저 말로 뱉은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군인이었고 상병이었고 여자친구가 있었으니, 최초의 그 누군가 뱉은 말의 씨가 자라기엔 최적의 환경이었다. 결국 그날 나는 공중전화박스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이별의 꽃을 보았다.


의외로 처음엔 담담했다.

여자친구는 직장인이었고 나는 제대하면 학교를 더 다녀야 하니 그 사람이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기회를 주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별의 후폭풍은 더욱 강해졌다.

나는 꽤 오랫동안 후회와 미련과 추억이 오고 가는 공허한 밤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금니 쪽이 아파왔다.

확인해 보니 어금니 옆쪽에서 사랑니가 자라고 있었다.

사랑니가 자라는 통증인가?

아니. 이별하고 나서 사랑니라니?

새로운 사랑이 오려고 그러나?.. 는 개뿔.

사랑니가 자랄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 빈도와 강도가 증가할수록 통증은 점점 마음에서 어금니로 옮겨갔다.

그러니까 하루하루가 통증의 연속이었다. 마음이 아프거나 어금니가 아프거나.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말년 병장이었고 통증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제대 후 우선 전 여자 친구에게 연락했다.

이별할 때는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군인이었고, 지금은 사회로 돌아왔으니 혹시 다시 만날 마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뭐. 예상하시는. 그거. 맞다. 재회 뭐. 이런 건 독자의 감동을 위한 소설이나 영화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건 에세이니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음은 아팠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그날 완전히 포기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있던 시절이었지만, 싫다는 나무를 찍으면 폭력이다.


나는 또 다른 통증에 집중하기로 했다.  

꽤 유명하고 시설 좋은 큰 치과에 예약했다. 

치과의사는 사랑니가 옆으로 자라면서 어금니를 계속 밀어내고 있다고 했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니, 이 사랑니는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어금니를 노렸던 것처럼. 머리의 방향이 완전히 어금니 쪽을 향하고 있었다. 계속 두면 사랑니가 나머지 이들을 밀어서 치열이 모두 망가지고 멀쩡한 이들도 흔들릴 수 있다고..

발치 중 큰 출혈이 생길 수 있으니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의사는 마치 이별을 계속 방치하면 일상을 계속 밀어내서 흔들릴 수 있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이별과 동시에 태어난 사랑니.

미련 없이 시원하게 뽑아 버리자.


나는 대학병원 치과 의자에 앉았다.

담당의는 꽤 난이도가 높은 발치라며 건장한 남자 몇 명을 나에게 붙였다.

마치 세상의 어떤 힘 좋은 기사가 와도 뽑히지 않는 신검 엑스칼리버를 뽑으러 모인 사람들 같았다.

나는 긴장 속에 입을 벌렸다.

내 입안 왼쪽 가장 구석자리엔 엑스칼러버가 옆으로 꽂혀 있었다.

건장한 남자들의 눈빛은 긴장과 기대감으로 빛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랑니는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한 미련이다

이 사랑니가 뽑히면 모든 걸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


달그락달그락. 쾅. 쾅.

입 안에서 윗집 인테리어 공사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전해졌다.

하지만 건장한 기사님들은 결국 내 엑스칼리버 사랑니 발치에 성공하셨고 나는 며칠 동안 발치 후의 통증과 허전함에 적응해야 했다.


통증이 아물 때쯤. 내 입안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별이 사랑니 발치만큼이나 아픈 건지. 사랑니 발치가 이별만큼 아픈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임은 확실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입 헹구시면 됩니다~

내 의식의 흐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눕혀졌던 의자는 다시 의자 본연의 위치로 돌아왔고 나는 입안을 물로 헹궜다.

입안이 얼얼하다.

이번엔 마취깨어나도 턱과 이가 모두 안 아팠으면 좋겠다.  





 


이전 05화 저와 같은 책을 읽고 계시네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