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었던 책이나 지금 읽고 있는 책과 똑같은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초면인데 구면처럼 반갑다.
상대가 읽고 있는 책이 종이책이라면 표지를 통해 무슨 책인지 알 수 있어서 반갑고, 전자책일 경우는 내 기기와 같은 ebook 리더기 혹은 내가 알고 있는 브랜드의 제품이라면 친근함이 느껴진다. ebook 리더기 사용자라면 온라인 카페에서 나와 대화를 나눠본 회원 중에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도 생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실제로 독서를 하는 인구가 많지 않기도 하고, 그중에서도 전자책을 이용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을 테니깐.
언젠가 그런 경험을 했다.
백화점 1층.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카드 결제하고 담보로 받은 진동벨을 카운터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리고 아메리카노가 준비되면 앉을 좋은 자리가 없을지 쭈욱 훑어보는데 창가에서 독서 중인 분을 발견했다.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책표지가 독특해서 멀리서도 금방 무슨 책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흰색 바탕에 굵은 검은색의 한글이 가로로, 에리히 프롬이라는 영문이 대각선으로 쓰여있는 표지는 몽골의 광활한 벌판 어느 나뭇가지에 걸려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어. 저거 나도 읽던 책인데!(읽은 책 아니고 읽던 책)
제목만 보면 무기력에 대항하는 실용서 같은 느낌이지만, 책의 내용은 좀 더 삶에 깊게 들어간다. 그래서 읽는 내내 여기저기 하이라이트를 무수하게 그었던 기억이 있다.
단순히 무기력을 벗어나는 10가지 방법. 이런 실용서였다면 금방 완독 했을 건데, 그런 가벼운 책이 아니라서 오히려 문장을 오징어보다 더 오래 곱씹다 보니 속도가 느려지고, 그러다가 다른 책들의 진도에 밀려서 읽다가 일시정지 되어버린 그런 책.
저 독자분은 어떤 마음으로 저 책을 선택했고 어떤 마음으로 읽고 있을까? 강렬한 제목에 마음이 동했던 걸까? 아니면 에리히 프롬이라는 작가가 좋아서 선택한 걸까?
가까이 다가가서
"저기.. 안녕하세요?"
"네?"
"인상이 선하셔서 그러는데 혹시 도에 관심 있으세요?.. 는 아니고, 그 책은 어떤 점이 끌려서 선택하신 거예요?
"아 네. 저는.. '라는 대화를 상상만 해봤다.
내 호기심은 소극적이니까.
정신 차리라고 진동벨이 울려댄다.
카운터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진동벨과 물물교환 한다.
어느 자리에 앉지?
독서하는 사람이 반가워 근처에 앉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런 마음이 있으니 괜히 더 근처에 못 앉겠다.
의식해 버려서. 뭔가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래서 오히려 더 떨어진 곳의 의자에 앉았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 마시고, 읽으려고 했던 책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구매 목록에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검색해서 찾아본다. 읽던 페이지를 열었더니 앞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곱씹던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다시 책의 첫 페이지로 돌아간다.
마치 처음 읽는 책인양 모든 것이 새롭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기억나지 않은 과거의 내가 그은 하이라이트 줄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많이 그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다니.. 점점 무기력해지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페이지를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