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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Jul 22. 2024

차가운 맥주가 여기 잠시 살았다는 걸

테이블 위의 물방울은 차가운 맥주가 살다 간 흔적이다.

해가 저물어도 동남아의 무더위는 24시간 편의점처럼 여전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바깥의 열기야 어쩔수 없으니 내 안에 스며든 열기라도 잠재워 보고자 나는 차가운 음료를 찾아 쇼핑몰을 어슬렁 거렸다. 긴 상점들의 골목을 지나 푸드코트에 도착한 내 눈에 작은 오픈형 바가 들어왔다.     


이미 문 닫은 식당이 많을 정도로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바에는 아무도 없었고, 카운터에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남자 바텐더가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냉장고의 밝은 조명 아래 차가운 냉기를 껴입고 줄지어 있는 병맥주들이 보였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의 모습이 하루를 정산하는 듯 보여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영업 끝났나요?

아니요. 주문하시겠어요? 메뉴는 바 테이블 위에 있습니다.

레오 맥주 큰 걸로 한 병 주세요.


나는 주문과 동시에 맥주 가격보다 큰 금액의 지폐 한 장을 그에게 건넨다.

바텐더는 돈 박스에서 거스름 돈을 추리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 후 에게 돌려준다.

테이블 위에 거스름 돈을 내려놓은 그의 손은 곧이어 냉장고 문을 열고 맨 앞줄에서 대기 중이던 레오 맥주를 집어 들었다. 병뚜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날아갔고, 냉장고에서의 오랜 대기 시간에 투정이라도 하 맥주병은 거품을 토해냈.

나는 재빨리 유리컵 기댄다.

하얀 거품은 노란 맥주와 함께 투명한 유리잔을 가득 채웠다.

벌컥벌컥.

부드러운 거품과 차가운 속살은 내 안에서 요동치던 열기를 잠재우고 갈증을 달랜다.


한국에서도 혼자 술집에 간적은 있지만 외국에서만큼 편하지는 않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혼자서 어디까지 가봤니? 에서 삼겹살집까진 못 가봤지만, 샤브샤브집까진 가봤다. 하지만, 어딜 가더라도 이상하게 한국에선 은근히 주위가 의식되어 편하진 않다.

하지만 해외는 그렇지 않다.

외롭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다. 그저 이 시간들이 소중할 뿐이다.  


나는 구석 자리 스피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맥주와 함께하는 음악은 클수록 좋으니까.

고막을 간지럽히는 음악의 리듬은 나와 로컬 브랜드 맥주 사이의 어색함을 빠르게 소멸시킨다.


천장에선 차가운 맥주보다 무더운 에어컨 바람이 내려와 내 머리카락을 뒤흔든다.

어차피 머리카락은 엉망이다.

하루종일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대신 맞아준 모자에서 막 해방된 머리카락은 에어컨 바람의 장난 섞인 손짓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머리를 확인해봤다. 가로수의 나뭇잎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헤어스타일은 정리가 불가능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늦은 시간이라 근처에 사람도 없고, 나는 여행객이니깐.



맥주로 가득 채웠던 큰 컵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다.

나는 그 황량한 밑바닥을 감추기 위해 맥주병을 다시 집어든다.

들어 올린 맥주병이 서있던 자리에는 물방울의 흔적이 가득했다.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차가운 맥주는 물방울을 남기는 걸까.


시원한 냉장고에서 뜨거운 바깥으로 나와 금세 차가움을 잃어버린 맥주병은 병바닥과 쏙 빼닮은 물방울을 끊임없이 흘려보내며 그가 이 세상에 잠시나마 존재했음을 처절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문득 매미가 떠올랐다.

최장 7년동안 유충 형태로 있다가 한여름 반짝 울다가 끝나는 매미의 삶.

오랜 시간동안 냉장고에서 차가움을 머금고 있다가 한여름 반짝 내 속에 시원함을 주고 빈병으로 돌아가는 병맥주.


테이블 위의 물방울은 그가 머물렀던 흔적이다.

흔적.

존재의 과거형.

적어도 내가 이 자리를 떠나기 전까지 그 흔적은 보존될 것이다.

병을 비우고 내가 일어서 주인장의 행주에 의해 지워지겠지.


문득, 그렇게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게 내버려둬선 안될거 같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이제 그 찰나의 순간은 이미지로 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 날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기억한다.

그의 삶에서 가장 찬란하게 차가웠던 순간.

나와 함께 그곳에 잠시 존재했었다는 것을.

그 날의 테이블 위 물방울은 차가운 맥주가 살다간 흔적이자 나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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