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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Aug 05. 2024

뜨거운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뜨거운 세상의 최후의 보루. 양산.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햇볕에 이빨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은 반드시 양산을 준비하셔서 햇볕의 이빨에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라는 재난문자가 울리기 전까진 내가 쓸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양산을.



양산을 구입한 건 3년 전 여름의 어느 날이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던 오후.

나는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난감했다. 한여름의 징검다리 같은 그늘이 거리에서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을 건널 때 신발을 젖지 않게 하기 위해 발을 디디는 징검다리처럼 뜨거운 햇살에 잠긴 거리의 그늘은 개울의 징검다리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날 오후의 태양은 하늘의 정중앙에 떠 있었고, 그림자들은 숨바꼭질하듯 건물의 벽 혹은 나무의 몸통에 붙어서 땅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몸을 숨길 곳이 없다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물 위를 걷는 무림 고수의 축지법처럼 최대한 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버스 정류장 앞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하늘의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그 아래층에 사는 초록빛은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뜨거워졌고,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은 끈적끈적한 땀이 되어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늘만 있었어도. 이 시간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을 텐데..

있을 리 없는 그늘을 찾아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없다. 하늘의 태양이 더욱 얄밉다.

아! 그늘이 없다면 내가 만들면 되잖아. 더 이상 그림자를 구걸하지 않겠어!


횡단보도는 곧이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다행히 버스는 바로 왔다.

나는 버스 안에서 '양산'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검색창에는 알록달록하고 레이스 달린 양산들이 쭈욱 나열됐다. 나는 다시 '남자 양산'을 검색했다. 종류가 굉장히 많아서 뭘 구입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었다.

그럼 선택의 기준을 세워야지. '좋은 양산 고르는 법'을 검색했다. 자외선과 열기를 제대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양산 안쪽에 차광막이 한번 더 덧대어 있는 양산. 그러니까 겉면과 속면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양산이 기능에 충실한 제품이라고 했다. 나는 관련 정보를 기준으로 몇 번 더 검색했고, 마침내 무난한 색과 디자인과 기능을 갖춘 적합한 양산을 찾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렇다. 장바구니에만 담았다. 막상 구매의 순간엔 망설여졌다. 거리에 양산을 쓰고 다니는 어르신들은 본 적이 몇 번 있지만, 젊은 사람들. 그중에도 남자가 들고 다니는 건 내 기억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요성은 느끼지만, 구입 후에 과연 정말 쓰고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연예인이나 패션을 선도하는 인플루언서도 아닌데 남들보다 먼저 양산을 손에 들고 다닐 수 있을까? 덜컥 샀다가 햇빛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는 용도로 쓰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결국 구매 버튼을 눌렀다.


양산은 도착했고, 나는 큰 마음먹고 양산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그날따라 거리에 양산을 든 사람이 없었다. 도서관에 반납할 책이 있어서 버스 정류장 두 코스 정도를 걸었는데, 그때까지 양산을 든 사람은 어머니 또래의 어르신 몇 분뿐이었다. 거기다가 바람까지 이쪽저쪽으로 불어대서 양산 뒤집어지지 않게 방향 조절까지 하느라 집에 돌아오니 피로감이 밀려왔다.

심지어 그다음 날부터 드디어 폭염이 끝났다는 뉴스와 함께 온도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양산은 그대로 우산보관함으로 들어갔다.


그런 경험 때문에 작년 여름에도 선뜻 양산에 손이 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그늘을 찾아다녔지만 양산을 챙기지는 않았다. 꽤 더운 날엔 가방에 넣고 나간 적은 있지만 꺼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작년 여름은 지나가고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역대 최고 폭염의 올해 여름.

나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양산을 가방에 챙긴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편다.

들고나갈까 말까. 가방에서 양산을 꺼낼까. 말까. 의 망설임은 없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나 말고 누가 또 양산을 들고 나왔는지 살피지도 않는다. 아침부터 작정하고 내리쬐는 햇볕이 너무 뜨겁다. 아니 따갑다. 태국여행할 때보다 낮은 온도인데 햇볕은 더 따갑게 느껴진다.

아직 재난문자에 그런 말은 없었지만,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와 환경오염으로 인해 햇볕에 이빨이 돋아난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의 따끔함이다. 이제 갓 이가 자라는 아기들의 이앓이처럼 이가 가려워서 막 무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내가 알던 햇볕이 아니었다. 그 따가움을 피하기 위해 또다시 그늘만 살피면서 걷느니 이제는 내가 만든 그늘 아래서 편안하게 걷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었다. 그래서 그냥 양산을 쓴다.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2년 사이에 내가 변한 건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양산을 안 쓴 사람을 보면 ‘나만 양산 쓴 거 아냐?’ 하는 눈치보단 ‘와. 저 사람은 땡볕 아래서 덥겠다 ‘ 걱정해 주는 여유까지 생겼다.


나처럼 햇볕에 물린 사람들이 많은지 올해는 점심시간이 되면 양산을 들고 다니는 젊은 남성, 여성들도 작년에 비해 많이 보인다. 국지성 호우에 대비해 준비한 우산을 겸사겸사 양산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들고 다니는 게 어디인가.

태양이 어디 사람 차별해서 온도 조절하는 것도 아닌데 태양 아래 남녀노소가 따로 있겠는가.

양산을 쓴다고 에어컨 튼 것처럼 특별히 시원하거나 그러진 않지만 적어도 머리는 안 뜨거워지니깐. 그 정도만이라도 만족한다. 더군다나 뜨거운 태양 아니더라도 요즘 열받을 일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뜨거운 태양 때문인지 뜨거운 일상 때문인지, 평소보다 예민하거나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난 거 같고, 뉴스에는 이해할 수 없는 범죄들도 부쩍 많이 일어나는 거 같은데. 이럴때 일수록 우리의 마음에도 작은 양산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뜨거운 햇볕처럼 뜨거운 뉴스와 일상 속에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이성이나 자아는 잃어버리지 않을 작은 그늘 하나 만들어 줄 수 있는 양산.

험한 세상의 징검다리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그늘 같은 양산.

세상의 모든 그늘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그늘.

많이도 필요 없고 딱 머리랑 어깨정도만이라도 가릴 수 있는. 그래서 어떤 극한 상황에서라도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줄 수 있는 그런 그늘이 모두에게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다.

뜨거운 분노가 이성을 물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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