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게임에 대해 설명하자면 각각 5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게임에서 지정한 장소를 차지한 후 100초 동안 버티면 이기는 게임이다. 각 팀의 5명은 높은 체력으로 버티면서 싸우는 '탱커'와 체력은 약하지만 공격력이 높은 '딜러', 상처 입은 팀원의 피를 채워주는 '힐러' 3가지 직업으로 구성되며 그 구성은 게임의 상황에 따라 사용자들이 바꿀 수 있다.
게임의 룰만 보면 자칫 단순하고 지루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각 팀당 5명씩 총 10명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게임은 그 단순한 게임 규칙을 복잡한 상황으로 종종 만들어 버린다.
10명은 곧 10개의 변수이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요즘 날씨가 변덕스럽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간만큼 예측하기 힘든 변수는 없다는 걸 게임을 할 때마다 항상 느낀다.
앞서 말했듯이 게임의 승리 규칙은 간단하다.
게임에서 지정한 장소(거점)를 점령하면 이긴다. 그러면 게임 시작과 동시에 먼저 거점을 점령하고 다가오는 적들을 무찌르거나, 적들이 먼저 거점을 점령했을 경우 싸워서 뺏으면 된다.
하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종종 다른 생각을 가진 팀원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 한 부류가 일종의 완벽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거점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외부에 있는 적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그럴 듯 한 말처럼 보일 수 있다. 적들을 모두 제거하면 거점으로 가기 편하고 점령하기도 편하니까. 하지만 죽은 적들은 곧 부활해서 다시 우리에게 달려오기 때문에, 그 팀원 말대로 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거점으로 가려면 상대팀 5명을 동시에 전멸시켜야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전원을 처치한다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보통은 그런 상황을 기대하다가 게임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임 속 완벽주의자.
그들은 적들을 전멸시키기 전에는 절대 거점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기준이 선행되기 전까진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팀원을 만나면 패배확률은 80프로 이상이다. -혹시라도 내가 기억나지 않는 게임이 있을까 싶어서 후하게 20프로를 남겨둔 것일 뿐. 지금 기억으론 그들의 완벽주의 성격만큼이나 패배확률은 완벽한 100프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의 완벽주의 성향은 거점 점령뿐만 아니라 게임의 모든 과정에도 계속된다.
적들과 싸우다 보면 체력이 좋은 캐릭터와 공격력이 센 캐릭터는 앞에서 싸우고, 비교적 체력이 약한 저격수나 팀원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힐러들은 뒤에서 보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특성을 이용해 때로는 상대의 적들 중 한 명이 뒤로 몰래 와서 후방에 있는 우리 팀원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그런 상황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된다면 그는 어김없이 다른 팀원들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야! 뒤 안보냐?"
채팅창에 이런 말까지 나오면 패배확률 100프로 확정이라고 보면 된다.
웬만하면 마음속으로만 '아 또 졌네..' 체념하지만, 그 비난의 정도가 심할 때는 나도 한마디 끼어든다.
"눈이 앞에 달렸는데 어떻게 뒤를 봐요?"
당연히 뒤는 못 본다.(물론 말의 뉘앙스는 앞도 보고 뒤도 보면서 팀원들도 보호해라는 것을 알지만 상대가 저렇게 공격적일 때는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다)
인간의 눈은 앞에 달려 있고, 게임 내에서도 우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상 앞만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에는 적이 있고, 전투는 늘 치열하다. 그 적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뒤를 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완벽주의자들은 앞을 보면서 동시에 뒤를 보길 바라고, 앞의 적과 싸우면서 동시에 뒤에 있는 자신도 보호해 주길 바라며, 그 와중에 그 모든 적들을 전멸시키고 거점으로 들어가는 걸 원한다.
고구마 백개의 섬유질이 느껴진다.
처음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땐 나도 내 의견을 피력했었다.
이 게임은 거점 점령을 하는 팀에게 승리를 부여하니깐, 핵심은 거점 점령이다. 빠르게 거점으로 들어가서 선점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먼저 거점으로 들어가서 거점부터 차지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 팀이 먼저 거점을 점령하고 있으면 적들은 우리 쪽으로 몰려올 수밖에 없고, 그때 오는 적들을 하나씩 상대하면 된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적들부터 처치하고 거점으로 가려고 하면 적들에 의해 우리는 여기 발이 묶인다. 적들을 우리에게 유일한 위치로 끌고 올 것인가. 우리가 적들에게 유리한 위치로 끌려갈 것인가의 문제다.
제발 거점 점령에 집중하자. 적들을 100번 죽여도 아무 의미 없다. 거점 점령 못하면 게임은 패배다.
하지만 대부분 소용없다.
그들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적들을 죽여야 거점으로 들어가지.
아.. 아니.. 우리가 거점으로 가면 적들도 그쪽으로 온다니깐! 우리가 그쪽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만 적들을 상대하니까 적들이 우리 앞에만 몰려 있고,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못 나가는 거야. 거기다가 적들이 거점을 점령하고 100초가 지나면 게임이 끝나는데, 제한된 시간 동안 거점에 발 한번 못 넣어보고 끝낼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적들이 앞에 있는데 앞에 있는 애들을 먼저 죽여야지.
그들의 주장은 고집이 된다. 상대의 말을 들어볼 생각은 없다. 그냥 자신의 의견대로 모두가 따라주길 바란다. 결국 우리는 거점에 발 한번 담가보지도 못하고 팀은 패배한다.
여기서부터 뒤끝이 시작된다.
게임의 패배 원인은 적들을 모두 처치하지 못한 다른 팀원들 때문이고, 자신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승리했을 거라고 비난한다. (거친 말이나 욕설이 첨부 되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입만 아프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안 만나는 게 최선이다.
마우스로 그 팀원의 아이디를 클릭하고 '7일간 팀으로 만나지 않기' 설정을 한다.
부디 다시는 같은 편으로 만나지 말자.
상대팀으로 만나면 땡큐다. 새로운 우리 팀의 승리 확률이 올라갈 테니깐.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온라인 게임이 우리의 작은 세상을 옮겨 놓은 거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나만 더 맛보기로 꺼내보면, 팀이 패배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상대팀이 잘하는 거 같으면) 꼭 '그냥 포기하자'라고 내뱉는 팀원도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질 거 같으니까 지레 겁먹고 그냥 내뱉는 말 같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보통 누군가가 가장 먼저 '포기하자'라고 말하면 보통 누군가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니 최선을 다하면 이길 수 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포기하자고 말한 사람은 '누가 봐도 진 게임'이라고 부정적인 말을 게임 내내 반복한다. 게임에 집중하지 않고 쓸데없는 글을 채팅창에 치는 것만 반복하면 당연히 패배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그렇게 실제로 게임이 패배로 끝나면 마치 자기는 선견지명이 있는 효율적인 사람인데 반해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말을 안 믿고 괜히 멍청하게 힘만 뺐다는 비난을 시작한다. 그 상황에서도 마치 자신은 패배와 상관없는 우월한 사람인 듯 다른 팀원들을 비난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처음엔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싶었지만, 의외로 그런 선동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수긍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 걸 보면 한 번 더 놀란다.
정치 사회 뉴스에서나 볼 수 있던 '논점 흐리기', '물타기', '선제 프레임 띄우기' '핵심 비켜가기', '가스라이팅'등의 일들이 10분 남짓한 게임 세상에서도 똑같이 구현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런데 게임을 왜 해? 안 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나도 그런 이유로 한동안 온라인 게임을 기피한 적이 있었다.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게임인데 왜 나는 장소만 옮겨서 종류가 다른 스트레스를 받고 속상해하는가.
그렇게 몇 달을 쉰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피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겠지만, 과연 피할 수 있을까? 게임이야 차단할 수 있지만, 실제 세상에선 그렇게 쉽지 않다. 오프라인에서의 관계란 '차단'버튼 하나로 간단하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실제 세상에도 나와 생각이 다르고 독특하고 고집 세고 이상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만약 내가 이런 불편한 상황을 무조건 피하기만 한다면, 실제 오프라인에서 무례하거나 이상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 당황해서 아무런 대응도 못한 채 당하고만 있지 않겠는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자꾸 피하려고 하기보단 더 들어가 보자. 오히려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런 상황을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비상식적인 상황에 면역이 생기지 않을까? 일종의 백신처럼.
그렇게 관점을 바꾸고 다시 게임에 접속해 본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상황을 마주하면 답답하고 짜증부터 난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쉽게 상대를 '차단'하기보단 좀 더 지켜보는 쪽을 선택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친구는 이번 게임에서만 이런 걸까. 아니면 다음번 게임에서도, 그 다음번 게임에서도 늘 똑같은 행동을 할까? 이런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방법은 없을까? 부드럽게 말해야 할까, 강하게 나가야 할까? 아니면 기분 상하지 않고 대응하는 방법은?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깐 그 상황 자체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듯 답답했던 마음은 조금 수그러들었고, 나는 플레이어가 아닌 연구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게임을 하는 동안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꼭 찾고 싶다.
현실에서 실제로 그런 캐릭터를 만났을 때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제대로 지혜롭게 비껴갈 수 있도록.
가능하다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으면서 부드럽게 풀어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거 같다.
백신의 원리는 우리가 방어해야 할 병원균을 약하게 만들어서 우리 몸에 침투시킨 후 그것을 방어하는 방법을 우리 몸이 기억하게 해서 다음에 본진(더 센 병원균)이 우리 몸에 들어왔을 때 제대로 면역 방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계속 온라인 게임을 하는 것도 백신과 비슷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물론 게임 자체의 재미가 더 크지만- 피하고 싶은 상황을 쉽게 피하려고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상황에 더 노출시킴으로써 실제 사회에서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보다 이성적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 이제는 오히려 더 다양한 어이없는 상황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그리고 극복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길. 다양한 세상의 면역이 생겨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