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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Jun 04. 2024

눈물 많은 사내인지라 슬픈 이야기는 선호하지 않습니다만

쓰레기 더미 속 남자와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남자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적당히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들과도 별다른 문제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다지 큰 비극도 없었단 이야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는 게 재미없었다. 어떤 일이든 그다지 애쓰고 싶지 않았다. 딱히 새롭게 하고 싶은 것조차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우울했다. 아무 일도 없을 텐데, 자신보다 훨씬 힘든 처지에 놓인 사람들조차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텐데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 혹시 본인에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 남자는 좀 두려웠다. 

      

남자는 애써 멀쩡해 보이려 했다. 별로 웃고 싶지 않아도 미소를 지었다. 그럴듯한 여가 활동을 하고 있는 양 꾸며댔다. 잘 지내냐는 부모의 전화에 아무 일 없다며 힘차게 대답하곤 했다.

남자에게 그 짓은 꽤 버거운 일이었는지 그는 점점 방전되기 시작했다. 출퇴근 말고는 외출하지 않으려 했다.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침대에 눕기 바빴다. 끼니를 배달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적당히 배가 불러오면 핸드폰을 바라보다 잠이 드는 나날을 보냈다. 

    

그날도 남자는 핸드폰을 하다 잠에 들려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초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녀석은 집요하게 남자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파리가 성가시다 못해 짜증 나게 여겨졌는지 남자는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갔어, 이놈.” 

남자의 시선이 녀석을 따라 허공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방구석에 있던 봉투 틈새로 숨어드는 놈을 포착했다. 남자는 녀석이 빠져나오기 전에 잽싸게 입구를 움켜잡았다.          

"잡았나?"

반투명한 비닐 너머 검은색 점 같은 게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였다. 포획을 확신한 남자는 봉투 입구를 재빠르게 묶어버렸다.

“뭐지?”

비닐을 얼굴에 가까이 대보니 검은색 몸부림이 추가로 발견됐다. 둘, 셋, 넷.. 대체 몇 마리인지. 벌집을 건드린 것 마냥 봉투 안에 수많은 점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스라쳐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철퍽.

흐뭇한 과육이 뭉개지는 소리. 남자는 발가락으로 봉투를 조심스레 들춰보았다. 비닐 바닥에 갈색 액체 따위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도무지 포장할 수 없을 정도로 썩은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널브러진 옷가지, 바닥을 구르는 페트병, 배달 음식을 먹고 치우지 않아 썩은 내를 풍기는 쓰레기들.

‘이게 사람 사는 꼴이 맞을까.’

남자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남자는 문득 자신이 시체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있고, 썩은 내를 풍기며 날파리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자신은 반쯤 시체인 거다. 그렇다면 저기 있는 쓰레기 산은 아마 제 무덤이 아닐까. 결함 있는 인간은 시신조차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는 거다.

"나한테 딱이네."     

남자는 습관적으로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생각지도 않게 툭 튀어나온 말이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남자의 머릿속을 휘집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서서히 남자를 감싸오는 듯했다.   

  

이 남자는 아마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서서히 곪아가는 종류의 사람일 거다. 나는 이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 「인간실격」 주인공 요조가 그랬다. 요조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감췄다. 익살꾼을 자처하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 따위를 꾸며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누군가에겐 그는 입맛대로 이용하기 좋은 녀석일 뿐이었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요조는 마약에 손을 댄다. 자살까지 시도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그는 정신 병원에 갇히게 된다. 이해와 공감이 필요했던 주인공은 최후의 순간까지 그냥 미친 사람, 인간 실격자 취급 되어 철저히 단절된 생을 마감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들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란 생각도 당연히 하지 못했다. 아무도 이해해 줄 사람이 없는(심지어 자신조차), 고립된 사람은 조용히 썩어가기 마련이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이 어두운 이야기보단 밝은 이야기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을 테다. 나만 해도 우울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나는 아주 풍부한 감수성의 소유자로서 (어려서부터 드라마 주인공이 울음을 터뜨릴 때면 나는 이 타고난 감수성을 발휘하곤 했다. 사내 새끼가 왜 이리 눈물이 많냐며 엄마에게 등짝을 맞곤 했지만 슬픈 걸 어찌하리..) 때로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이 나까지 휩쓸어가지 않도록 애쓰곤 한다. 내 생각에 슬픔을 공감하는 일은 이런 애씀이 필요하므로 좀 피곤한 일이다. 

         

다만 한 번씩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겨서인지, 그저 단순한 변덕에서 인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인간을 도무지 혼자 두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이번에 나는 애쓰기 전 준비 운동을 하듯 질문부터 해보기 시작하려 한다. 이 인간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나는 내 마음에 부담이 걸리지 않도록 멀리 떨어진 관찰자 입장에서부터 남자를 바라봐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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