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밤 10시 30분, 사람이 많지 않은 영화관. 전세 낸 듯한 기분에 종종 혼자 보러 오는 곳이었다. 따로 예약은 하지 않고 당장 볼 수 있는 걸로 골라 자리에 앉았다. 장르가 뭔지,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상영 5분 정도만에 '실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재빨리 내 자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 칸 떨어져 옆에 혼자 앉아있는 여성을 빼면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그래, 2시간 정도만 참아보자.'라는 생각으로 시청을 재개했다. 제목이 '생일'이란 영화였다.
영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눈시울이 붉어진 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참기 힘든 와중 옆자리 여성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결국 참을 수 없었다. 견뎌보자 라는 각오가 무색하게 상영 시간 내내 눈물, 콧물을 맘껏 쏟아냈다. 스크린이 거메지고 영화관에 다시 불이 들어오자 나는 옆자리 사람이 볼까 무서워 후다닥 자리에서 도망쳐나갔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영화관을 나왔다. 콧구멍에 잔여물을 훌쩍거리며 생각했다.
‘좋은 영화였다.’
다 큰 성인 남성이 되어 영화관에서 혼자 펑펑 울어버리는 치태를 부렸음에도 후회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눈물샘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재능 있었다. 가족들과 티브이를 보다 슬픈 장면이 나오면 나는 어김없이 훌쩍거렸다. 엄마는 귀신같이 내가 우는 걸 발견하곤 사내 새끼가 왜 이리 눈물이 많냐며 등짝을 때리곤 했다. 그럼에도 슬픈 영화나 드라마 보기를 좋아했다.
나는 우울한 감정에 취하기를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때로 처해있는 상황을 한껏 비관해 보고, 슬픈 노래를 듣는다. 자신이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해진다. 그 기분은 어쩌면 썩 나쁘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 않나. 비극이든, 희극이든 말이다. 특별한 인간이 되는 느낌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을 뽑아 든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테다. 책에는 단편 소설 8편이 실려 있었다. 각각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불행했다. 그리 큰 행복을 바라지도 않았건만 번번이 좌절되고, 힘겨워했다.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책 속 인물들을 도무지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위로하는 글을 썼다.
다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뻔한 위로와 격려, 어딘가 횡설수설하는 문장.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다지 훌륭해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내 글을 보고 눈물이 났다.
'왜 이러지?‘
은연중에 『비행운』을 읽고 쓰레기 더미 속 나를 떠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 또한 비(非) 행운 한 인간이었다. 나는 『비행운』 속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자신의 글이 마음에 와닿았은 이유였다.
취미 삼아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은 제삼자로서 나를 위로하기도, 또 다른 누군가를 위로할 수도 있을 거라 여겨졌다. 그건 꽤 멋진 일 아닌가.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곤 한다. 독서, 영화, 글쓰기 따위라고 답하면 좀 재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할까 염려되 서다. 사실 난 좀 재수 없는 사람이긴 하다. 앞서 말했듯 비극이든 희극이든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어딘가 좀 눈꼴시니까.
주인공이 되는 감각에 지나치게 취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삶의 주인공이 되고자 애쓰고자 한다. 그래서 글을 쓰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으니까. 그러다 좀 괜찮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적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