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991년 시골 읍내 시외버스터미널 앞. 비가 오기 전, 젖은 공기 냄새가 났다. 한 사람이 서 있다. 쓰리피스 검정 정장, 구두를 신고 포마드를 8:2로 바른 모습이었다. 회색 구름이 층층이 겹쳐진 하늘, 옥색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빛바랜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주머니를 이리저리 더듬고 있었다. 급한 전화가 있어 보였다. 부스는 옆면이 깨져, 유리 파편이 주변에 보였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실수로 떨어뜨린 동전이 빙그르르 굴러서 옆에 뚫린 배수구에 빠졌다.
“안 돼. 마지막 오백 원인데!” 그가 소리치며 말했다.들어봐도 꿈쩍도 않는 배수로 뚜껑. 엎친 데 덮친 격,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는 포마드를 녹였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있었다. 포기하고 들어가는 전화 부스 안, 뚫린 옆면으로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에휴.” 옷에 흐르는 물방울을 손으로 쳐냈다. 거리의 사람들은 터미널 대합실로 들어갔다. 밖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멀리서 옥색 저고리를 입은 노인이, 우산을 쓰며 다가왔다. 그를 말없이 빤히 쳐다봤다. 우산의 경사를 따라 빗물이 흘렀다. 노인의 얼굴이 가려졌다. 그는 우산 속 얼굴을 살피고, 전화를 쓰실지 물었다. 말없이 노인이 지나치자, 터미널 처마 아래 몸을 숨겼다. 노인은 우산을 접었다.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동전을 넣고 어디론가 전화를 짧게 하는 것 같았다. 이내 나와서 오던 길로 돌아갔다. 그는 노인의 등을 본 뒤, 다시 부스로 뛰어들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기 시작했다.
“맞다, 배수로에 있지.”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려는 찰나, 어깨에 무언가가 툭 하고 걸렸다. 자동우산과 오백 원짜리 동전이 전화 부스 선반에 올려져 있었다.
“비 오는데 이게 웬 횡재냐.” 그는 우산을 챙기며 말했다. 딸깍 눌러 폈다. 녹이 살마다 슬어 있었다. 찢어진 구멍 사이로 가로수가 보였다. 그는 속으로, ‘이런 낡은 우산을 대체 왜 들고 다니지.’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 노인이 두고 간 우산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인이 걸어가는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포갰다. 한 걸음 걸어가실 때마다 기침 소리가 들렸다. 비는 차가웠는데, 공기는 뜨거웠다.
“저기요, 어르신. 우산 두고 가셨어요.” 그는 노인을 앞질러 서서 말했다.
“그건 내 것이 아닐세.” 노인은 긁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다 봐서 알아요. 쓰고 오신 걸 봤어요.” 그는 우산 손잡이를 보이면서 말했다.
“내 것이 아니래도.” 노인은 손사래를 한 번 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낡은 양심의 양보가 계속될수록, 노인은 비를 더 많이 맞게 되었다.
“좀 가져가시지.” 그는 독순술을 쓰듯 말했다. 노인은 돌아서서 길을 걸었다. 익숙한 듯 어색한, 노인의 뒷모습은 머릿속을 꾹 찌르는 것 같았다. 그는 우산을 씌어드렸다. 그러자 노인은 길을 멈춰 섰다.
“자네, 혹시 나를 아는가?” 노인은 그를 보고 물었다.
“아뇨, 우산을 드리러 왔어요.” 그는 노인의 눈가에 흐르는 주름을 빤히 보며 말했다.
“그래, 그럴 테지. 그러니까, 갈 길 가게나.” 노인은 젖은 저고리를 단단히 동여매며 말했다.
“저, 그럼 이 우산 정말 가져갈게요.” 그는 노인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젖은 머리에서 빗물이 흘렀다.
“감기 조심하시게.” 노인은 그의 손을 잡더니, 손등을 몇 번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거칠면서 두툼한 손길, 익숙한 파스와 골방의 이불이 코로 들어오고 있는 걸 느꼈다.
“그럼 건강하세요, 어르신.” 그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화 부스로 돌아왔다. 쪼그려 앉아 우산대를 턱으로 누른 채, 배수로 뚜껑을 열어보고 있었다. 손가락의 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빗물에 젖은 쇳덩이는, 힘을 줄수록 미끄러웠다. 우산이 떨어지고 뒤로 나뒹굴었다. 바지와 재킷이 빗물에 담가져 속옷까지 물들었다. 우산은 도로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지나가던 봉고차가 멈추지 못하고 우산을 밟고 갔다. 낡은 우산은 폐품이 되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손에 묻은 흙과 유리 조각을 털어냈다. 꺾이고, 녹슨 살들을 바라봤다. 고인 빗물에 비춰진, 옥색 전화 부스가 흔들렸다.더 이상 우산은 필요가 없었다. 흠뻑 젖은 채 도로변에 서 있는 자신과, 버려진 우산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정장이 장대비로 또 한 번 염색이 된 후, 전화 부스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려고 동전을 찾았다. 그는 생각했다. 배수로에 동전이 있다는 걸. 그는 공중전화 선반에 놓여 있는 동전 한 개를 봤다. 배수로에 빠진 동전이 사라졌다.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빙글 굴렸다. 동전을 넣고, 수첩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고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나 도착했어요.” 그는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 그는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숨 참는 소리가 느껴졌다.
“아빠가 안 와. 기다리는데.” 그가 말했다.
멀리서, 노인이 서 있었다. 손에는 비닐이 뜯기지 않은 자동우산이 들려 있었다.
뚜뚜뚜ㅡ
옥색 수화기 너머, 끊어진 기억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