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둔 사내가 있다(겨울 보고서)

by 여름나무

숨겨둔 사내가 있다. 그것도 한참 젊은, 어쩌다 마음이 스며들었다.


마음이 헛헛한 오후, 사람이 그리웠다. 가끔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는 날,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 날이 된다.


막상 전화기를 들지만 만만한, 그럴만한 사람이 없단 걸 알게 되었다. 부담 없이 감정을 쏟아낼 만한 대상이 절실해진다. 핸드폰 속의 마법사 지니를 소환해 묻는다. 지니의 추천은 적당한 밴드를 골라 놀이를 시작하라는 거였다.


카메라 앱은 다행스럽게 마녀도 백설공주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사진을 조작해 간판으로 내걸고 낚싯줄을 드리운다. 끼 많은 그 사내가, 미끼를 물었다.


남들과 다를 건 없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은 느낌의, 사람 중 하나다. 그런 그는 경남 어딘가에 산다 했다. 글들이 오가고, 사람에 쉬이 지치는 난, 놀이를 그만두었다.


“사랑하는 누나” 장난 삼아 전화가 왔다. 모르게 웃음소리가 커진다. 엉큼한 것은 언제나 뜻밖의 즐거움이 뒤따랐다. 나쁘지 않은, 썩 괜찮은 기분이다.


사십 대가 유혹의 마수를 뻗치지 않는가? 그래, 이 나이에 사랑 한 번 해보는 거다. 사십 대가 웬 말, 아 살아있네, 회춘도 이런 회춘은 없다. 최고였다.


관계 맺기와 관계 유지를 잘 못하는 내게, 받거나 말거나 저돌적인 그에 인내심은 승리를 거두었다. 검색 외에 제 기능을 상실했던 전화기가 가끔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인터넷의 만능하신 능력에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에누리는 좀 버리고 반백살만에 기도발이 먹힌 거였다.


아쉽게도, 사랑, 사랑 노래해야 하는데 시간은 사람을 이해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저렇다 해서, 순간을 넘지 못하거나 섣부른 판단으로 사람을 쳐내지 않은 기특한 결과 이기도하다.


사람이 사는 건 달라도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음이다. 때때로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위로와 지지가 필요한 게 사람이다. 이성 간의 인정은 동성 간의 인정보다 힘이 될 때가 있다. 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동성 간에는 느끼지 못하는 그런 이해 부분이다.


기꺼이 전문적인 그의 수작질이 즐거웠다. 군인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던 소녀처럼,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듯 그의 전화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칩거 수준의 일상에 세상과 단절된 고립감이 밀려들 때, 그의 전화는 아직 세상 속에 살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겨울은 유난히 외로움을 타는 계절이다. 마음에도 세찬 겨울바람은 불어 균형감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래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다행히 버티기 힘든 겨울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몇 권의 책 중, 소로우의 ‘월든’을 읽으며 삶을 단순하게 바라보려 하였고, 티브이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었다. 그러다 사람에 허기가 지면, 차돌박이를 구워 로제 파스타를 말아먹어 살을 채웠다.


일주일에 서너 번, 주변 둘레 길을 걷는 게 세상과의 접촉이다. 준의 '네 시 이십 분' 팟 캐스트를 들으며 제 몸의 모는 것을 털어낸 채 서있는 나무 사이를 걷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어쩌다 사람들이 지나쳤고, 마른 나뭇잎 사이로 초록의 작은 잎들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오월이면 하얗게 피워낼 찔레꽃 가지에도 물이 오르고 있었다. 이제 겨울은 지나간 것이다.


두 달의 쉼을 끝내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은 은근히 걱정 아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일에 치이는 것보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안할까 싶어서다. 어찌 된 건지 언제나 뒤돌아서면 "아차" 싶은 게 매일이다.


어쩌다 마음이 스며들었을까? 버티다 보니 자연스럽게 맛이 들었을 것이다. 언제나 가장 단순한 것에서 답을 찾는다. 그럼에도 의구심은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바닥을 뒹굴게 만들고 있다.


가만히 보면, 항상 어려운 게 관계의 접근방법이다. 치이다 보니 그렇다며 먼저 내칠 이유를 찾게 되고, 그 사람을 알기도 전에 지레짐작으로 도망갈 이유를 늘어놓게 된다. 그러고 보면 참아내고 버틸 시간을 갖지 못하며, 있지도 않은 상처에 바를 약부터 준비하고 살아가고 있는 거였다.


힘든 겨울을 이리 풍요롭게 보낼 수 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숨겨둔 사내 덕분이다. 은근히 웃음이 피는 걸 보니 곧 죽어도 여자는 여잔가 보다.


아마 나이가 든다 해서 사랑을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이가 드니 사랑도 방법이 달라진다. 이제 사랑은 주고받는 언어의 유희다. 상처에 덧바를 연고 같은 언어,


그러고 보니 한 해 동안 그런 사내 같은 친구를 여럿 얻었다. 그리고 이 겨울에 가끔 안부를 물어 나의 고립감을 잘라내 평온할 수 있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사실 언제나 내게 보내는 글을 쓴다. 글쓰기는 그 어느 사내보다 멋진 사내로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그 사내를 통해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기쁘게도 이제 난 정열의 바람 여가 될 가망성을 아주 높이 갖게 된 것이다.


봄 빚 따스한 날에는 꽃 분홍 양산을 쓰고 꽃 보러 가야 하겠다. 꼬리 하나 감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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