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센트럴 파크와 함께 하는 맨해튼 발전의 전환시대

by 박성기

1. 물결 위의 천국, 레나페족의 '마나하탄'시대

2. 항해시대의 확장과 북미대륙 속의 '마나하탄' 시대

3. 영국령 뉴욕 속의 '맨해튼' 시대

4. 미국의 초대 수도와 상업 수도의 '맨해튼' 시대

5. 격자계획으로 도약하는 '맨해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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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센트럴 파크와 함께 하는 맨해튼 발전의 전환시대>




맨해튼의 센트럴파크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마차투어를 선사합니다. 코치맨은 이 공원의 역사와 명물을 소개해 줍니다. 350편의 영화를 촬영한 이곳은 이제 세계인들이 즐기는 명물이 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 뉴욕 맨해튼은 1811년 그리드 계획에 따라 획일적인 블록으로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효율적인 토지 분할에는 성공했지만, 도시의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밀집은 도시민의 삶의 질과 정신 건강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센트럴 파크입니다.




그리드 계획은 당시 발달된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의 북쪽, 즉 14번가 이상 155번가 이하의 맨해튼 섬 전체에 걸쳐 광범위한 격자형 도로망을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에서 센트럴파크 지역은 예외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실제로 도로를 측정하고, 토지를 정리하고, 거리와 블록을 물리적으로 조성하는 작업은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도시 개발과 인구 증가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서서히 진행됨에 따라, 그리드 계획은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1858년 센트럴 파크가 착공되었고, 공원 북쪽 지역은 여전히 미개발지이거나 토지 정리가 완료되지 않은 곳이 많았습니다. 1876년 센트럴 파크가 최종 완공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그리드 계획도 물리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런 시점의 유사성은 센트럴파크의 '그린스워드 계획'과 '그리드계획'의 대비된 운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센트럴 파크는 모든 토지를 개발 대상으로 보던 당시의 경제 논리에서 벗어난 혁명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조경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와 건축가 칼버트 보의 노력으로 착공되었습니다. 옴스테드의 주장처럼 삭막한 도시 생활로 인한 피로를 해소하고 모든 계층이 어울릴 수 있는 '민주적인 안식처'로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센트럴 파크는 격자형 도시 계획 내에 의도된 '예외'를 두어 도시 설계의 구조적 기준점을 마련했습니다. 이 공원은 1876년 완공되어, 뉴욕의 북부 지역인 어퍼 웨스트, 어퍼이스트 사이드 개발의 지리적 기준선이 되었습니다.




센트럴 파크가 '도시의 허파'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부지의 합법적인 확보가 필요했습니다. 이 과정은 주로 수용과 강제 퇴거로 이루어졌습니다. 공원 부지로 지정된 59번가에서 106번가 사이의 약 778에이커 지역은 당시 미드타운 북쪽의 도시 외곽이었습니다. 이곳은 바위투성이 언덕, 늪지, 그리고 주택과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었니다. 여기가 바로 원주민 레나페 족의 겨울 사냥 터전이었습니다. 그들인 많은 언덕이 있고, 나무가 많은 이곳에서 사냥을 즐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리드계획에서 예외로 둔 이 지역을 도시 개발론자들은 이 땅을 "불모의 땅"으로 묘사하며 공원 조성을 정당화했습니다.




뉴욕시는 '수용권(Eminent Domain)'을 사용하여 이 토지를 매입했습니다. 시 정부는 토지 소유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으나, 그 금액은 종종 시세보다 낮거나 불공평하다는 논란을 낳았습니다.




그린스워드 계획(Greensward Plan)은 뉴욕 디자인 공모전의 승자인 옴스테드(Olmsted)와 보(Vaux)의 혁신적인 설계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공원내부의 곡선형 순환 도로 (Curving Drives and Paths)는 삭막한 도시의 직선에 익숙해진 도시민들에게, 공원 내부의 모든 도로와 산책로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고 길을 따라 풍경이 계속해서 새롭게 펼쳐지는 '예측 불가능한 자연'의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교통 동선의 분리 (Separated Circulation)는 공원 내에서 마차 도로, 보행자 길, 승마용 길을 입체적으로 분리하여, 서로 방해받지 않고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옴스테드가 주장한 '민주적 안식처'의 중요한 물리적 구현이었습니다.



자연주의적 조경 (Naturalistic Landscape)은 공원 내의 언덕, 호수, 숲은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되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치밀하게 계획되었습니다. 이는 획일적인 그리드 도시와는 정반대 되는, '거대한 살아있는 예술 작품'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설계 덕분에 센트럴 파크는 뉴욕 시민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위한 도시 인프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약 500만 그루의 나무와 관목이 심어졌는데, 이는 모두 자연적인 숲처럼 보이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조경 작업의 결과였습니다. 센트럴 파크는 자연을 그대로 보존한 공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디자인하여 만든 인공의 자연입니다. 이는 격자형 도시의 인공성과 대비되는 '자연의 환상(illusion of nature)'을 창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었습니다.




센트럴 파크 부지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은 세네카 빌리지였습니다. 1825년경 조성된 이 마을은 당시 뉴욕 시에서 최초로 그리고 가장 큰아프리카계 미국인 소유의 토지 공동체였습니다. 이곳은 흑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며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약 225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다수였고, 일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도 거주했습니다. 이들은 교회 3개, 학교, 묘지 등을 운영하며 커뮤니티를 형성했습니다.




공원 건설 계획이 확정되자, 1857년 시 정부는 이 지역 거주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보상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민들은 정든 집을 떠나야 했고, 재정착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공원 조성이 시작되면서 마을의 모든 흔적은 지워졌고, 수십 년 동안 세네카 빌리지의 역사는 사실상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도시 개발 과정에서 소수자 커뮤니티가 희생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센트럴 파크는 오늘날 뉴욕의 자랑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도시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희생된 초기 이민자와 소수민족 공동체의 복잡하고 어두운 역사가 함께 존재합니다.




센트럴 파크의 완공은 주변 부동산 시장에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공원의 영구적인 녹지 조망권은 인근 지역을 뉴욕 최고의 부촌으로 탈바꿈시키는 부동산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첫 번째 상징적인 건축물은 1884년에 완공된 다코타 빌딩(The Dakota)입니다. 다코타 빌딩은 센트럴 파크 서쪽(Central Park West)에 공원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지어진 최초의 럭셔리 아파트였습니다. 당시 엘리베이터 기술과 강철 골조가 아직 초기 단계였던 만큼, 이 건물은 벽돌과 석재를 이용한 고전적인 건축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뉴욕의 '고전적인 부(Old Money)'와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다코타 빌딩의 성공은 센트럴 파크 주변이 상업 지구가 아닌 고급 주거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이 지역에 수많은 호화 주택과 아파트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센트럴 파크는 맨해튼 개발 계획에서 비경제적 가치(휴식과 치유)를 중심에 둠으로써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다코타 빌딩은 이 '공원 가치'를 이용하여 주변 부동산의 경제적 잠재력을 처음으로 현실화시킨 건물입니다. 이 두 랜드마크의 결합은 뉴욕의 발전 방향을 '빽빽한 상업 중심지'에서 '삶의 질을 고려한 고급 주거 중심지'로 확장시키는 초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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